'정석종, 그의 삶과 역사학' 출간

  • 박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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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2-21 11:23  |  수정 2020-02-21 13:35  |  발행일 2020-02-22 제21면
민중사학 1세대의 선두주자...초대 역사문제연구소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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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종, 그의 삶과 역사학' 책 표지.


'민중사학 1세대'의 선두주자이자 초대 역사문제연구소장을 지낸 정석종 영남대 교수(사학과) 타계 20주년을 맞아 '정석종, 그의 삶과 역사학'(정석종기념문집편찬위원회 엮음) 이 출간됐다.

정석종기념문집편찬위원회가 엮어 펴낸 '정석종,그의 삶과 역사학'에는 정석종 교수의 삶의 흔적을 그린 추모글과, 고인의 논문 중 민중운동사 관련 논문이 실려있다. 1부 '추모문집'에는 22인의 추모글과 1편의 대담글이 수록되어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한때의 정석종을 기억하는 단편의 글들이 모여 '정석종'이라는 한 인간의 삶을 재구성했다.

정석종 교수는 1937년에 함경남도 신흥에서 태어나 1947년 월남한 실향민으로 1950년 대구에서 전시통합중학을 다녔다. 1957년 서울대 문리과대학 사학과에 입학하여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학풍 속에서 선학들의 지도보다는 학우들과의 토론을 통해 성장했고, 4·19의 현장에서 시위에 뛰어들기도 했다. 본격적인 학자의 길을 걸으면서 규장각의 사료 더미 속에서 목소리 잃은 민중의 흔적을 찾았다.

1968년 석사학위논문에서는 조선 후기의 신분제 붕괴 현상을 실증했고, 1983년 박사학위논문을 통해서는 당쟁사뿐 아니라 민중운동사를 조선시대 정치사의 영역에 포함시키는 독특한 시각을 제시하여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범죄인 조사·신문·재판 기록인 '추안급국안'을 발굴하여 장길산 부대, 무신난, 홍경래난 등에 참가한 인물들의 정치·사회경제·사상사적 궤적을 생생한 역사적 사실로 그려냄으로써 민중운동사를 개척한 제1세대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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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종 전 영남대 사학과 교수는 민중사학 1세대의 선두주자로 꼽힌다.


치열한 학문의 길에서 건강을 다치기도 하고, 가난에 고통 받기도 했다. 대학 강단에 서면서는 후학들에게 '민중'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법을 가르치고, 운동권 제자를 위해 보이지 않는 보호와 지원의 손길을 아끼지 않았다. 학자로서 현실 참여의 길을 모색하며 역사문제연구소의 초대 소장이 되었고, 자녀를 통해 1980년대 중·고등학교 교육민주화 운동과도 연을 맺었다.

1945년 이후 분단 구조와 이승만 독재 정권 아래에서 일제 식민사학의 영향력은 여전히 강력했고, 한국 사학계는 대부분 왕조사관에 매몰되어 있었다. 근대사의 이론이 정립되지 못한 학문 풍토에서, 이를 재정립하고 타파하려는 소장 연구자들이 하나 둘 등장했다. 이들은 민족 문제와 민주주의를 왜곡하는 이승만 독재 정권과 박정희 군사 정권 및 유신 정권 아래에서 방황과 고통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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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종 교수는 후학들에게 '민중'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법을 가르치고, 운동권 제자를 위해 보이지 않는 보호와 지원의 손길을 아끼지 않았다.


'모순과 갈등의 시대에 역사가의 역할은 무엇인지, 역사는 현실에 맞서 교훈과 무기가 될 수 있는지'라는 화두를 품고 치열하게 학문을 탐구했다. 이들 소장 그룹의 한 멤버로서 한국 역사학계에 '민중사'라는 새로운 시선과 영역을 개척한 정석종 교수는 기존의 연구에 안주하지 않고 창의적인 이론을 제시하면서 독창적인 학문 세계를 수립했다. '추안급국안'을 비롯, 먼지 속에 파묻혀 있던 사료를 발굴하여 생명을 부여했다. 그리하여 1980년대와 1990년대 한국 사학계를 이끈 리더가 되었다.

정석종 교수는 민중의 저항운동을 정치사의 한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독특한 논지를 폈다. 천민들의 비밀결사체인 살인계(殺人契)는 물론이고, 상인, 역관, 무인, 서얼 등 중인들의 움직임도 정치 현실과 무관하지 않았다. 역관들은 무역으로 축적한 재부를 이용해 정권 탈취에 나섰다. 정석종은 그 예시의 하나로 창우(倡優) 출신의 극적(劇賊) 장길산을 들었다. 끝내 조선왕실에 잡히지 않음으로써 신화를 완성했던 장길산의 이야기는 걸출한 이야기꾼 황석영에게 소개됨으로써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장길산'이라는 소설로 승화되기도 했다.

이러한 작업은 그의 규장각 시절에 시작된 치열한 사료 발굴로 가능했다. 그는 유명한 '추안급국안'을 비롯하여 '관서신미록', '진중일기', '안릉일기', '홍씨일기' 등 수많은 사료를 번역·해제·분석함으로써 한국 사학계에 '민중운동사'의 시작을 알렸고, 민중운동사를 탐구하고자 하는 후학들에게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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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종 교수는 1980년대와 1990년대 한국 사학계를 이끈 리더로 평가받고 있다.


2020년은 한국 민주운동사 1세대 연구자이자, 역사문제연구소 초대 소장이었던 정석종 교수가 타계한 지 20주기가 되는 해다. 고인은 학부 시절 4·19혁명을 경험했고, 대학원에 진학한 이후에는 역사학계의 화두였던 민중 주체의 역사상을 규명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1986년에는 역사문제연구소의 초대 소장을 맡아 역사인식의 심화와 대중화를 통해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진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의 사후 20년, 이제 동료와 후학들이 그의 삶과 역사학을 되돌아봄으로써 '역사학자'로서, 그리고 '시대의 증인'으로서 늘 눈앞의 과제를 정면 돌파하고자 했던 인간 정석종을 재조명한다.
정석종기념문집편찬위원회에는 김경희·박현수·배경식·이만열·이이화·임헌영·정지창·정진아·채희완씨가 참여했다.

박종문기자 kpj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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