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색·실·직물·봉제·미싱거리 거미망 인프라…돈 모여드는 '섬유 권하는 세상'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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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2-28   |  발행일 2020-02-28 제34면   |  수정 2020-02-28
■ 대구섬유 어제와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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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오롱의 나일론과 함께 대구 섬유 골든시기를 개척한 삼성물산의 모체인 제일모직 침산동 공장터. 1950년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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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처음으로 나일론 시대를 개척한 코오롱 대구공장의 1950년대 모습. 생산 공장은 1974년 구미공단으로 이전된다.

우리나라 최초로 면직물이 생산됐던 곳은 의성이다. 문익점의 처가인 의성에서 장인인 정천익에 의해 재배되던 목화는 문익점의 손자 문래가 그 이름을 딴 물레를 만들어 실을 뽑는다. 문래의 동생 문영은 베틀을 만들어 베를 생산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 '무명'으로 전하게 된다. 그로 인해 서민의 대명사인 '무명천'이 탄생하게 된다.

6·25전쟁은 대구를 단번에 섬유도시로 등극시켜준다. 대구·부산을 제외한 다른 지역의 기반시설이 거의 파괴된 탓이다. 화학섬유가 성공하려면 염료산업이 함께 탄탄해야만 했다. 이를 간파한 경북직물조합이 공동출자해 '경북염공'이란 염색공장을 설립한다. 이게 기반이 돼 1980년 대구 비산동 염색공단이 조성된다. 당시에는 염료가 돈이 됐다. 중구 섬유회관 맞은편 동산파출소 근처를 중심으로 서문로 일대에 최강 염료·화공약품거리가 형성된다. 지금 드문드문 남아 있는 가게가 다 그 시절의 연장에 있다.

광복 이후 사업체 일제조사 결과, 한국섬유공업의 24.2%인 149개 업체가 대구경북에 입지해 있었고, 그 중 95개 업체가 대구에 집중돼 있었다. 1974년 전수조사에 따르면 대구지역에 있는 섬유 관련 업체는 모두 1천10개. 86년 직기보유 전국 조사에 따르면 대구는 8만4천116대, 경북은 4만656대. 전국의 63.4%. 능금과 양계의 도시였던 대구는 섬유도시가 된다. 대구와 쌍벽을 이룬 부산은 섬유에서 벗어나 신발 1번지로 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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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전국 원단 유통량의 40% 시대를 연 대구 서문시장. 하지만 경부고속도로와 급부상한 서울 동대문 상권에 밀리면서 점차 쇠락의 길을 걷는다. 서문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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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국민부업시대'를 열어준 홀치기틀. 대구섬유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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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강의 벨벳시대를 개척해 나간 영도벨벳의 벨벳복합문화공간인 영도다움 전시관에 진열된 각종 상품들.


최강 염료 기반 비산동 염색공단 조성
박동준 등 70년대 패션디자이너 부각
금은방거리 겸비 대신동은'슈퍼 상권'
불고기·갈비골목 식당도 덩달아 호황

국산 양복지 골덴텍스 출시 제일모직
한국 첫 나일론 시대 개척 코오롱 공장
대한방직 자리 침산동 일대 1공단 조성
복합 공업단지 조성…제3공단 확장세

수출중심 생산 전략, 내수시장 등한시
매머드 메이커도 구미 공단으로 이탈
시내 8개 공장 중 1개 폐업, 내리막길
6800억 투입 돌파구 '밀라노프로젝트'


섬유는 대구 산업의 맏형격이었다. 섬유특수는 30여년 식을 줄을 몰랐다. 섬유공장을 세우면 다 돈이 됐다. '섬유 권하는 세상'이었다. 사업가들은 다들 섬유쪽으로 몰려들었다. 비산동, 평리동, 내당동, 원대동, 동인동, 남산동, 대명동, 칠성동, 산격동, 송현동, 화원, 월배, 반야월, 검단동…. 부지가 보이면 부리나케 공장을 지었다.


◆서문시장은 섬유시장

서문시장(큰장)은 졸지에 '섬유시장'으로 등극한다. 서문시장은 대구 섬유의 총사령부였다. 섬유 관련 모든 업종이 그걸 중심으로 이합집산했다.

하나의 실은 직물, 염색된 직물은 각종 섬유제품으로 피어났다. 내복(메리야스), 장갑, 양말, 우산, 이불(침구), 커튼, 손수건 등을 생산해낼 수 있는 섬유 관련 모든 인프라가 대구 도심 안에 밀집돼 있었다. 실공장, 직물공장, 봉제거리, 부자재거리, 미싱거리가 거미망처럼 연결돼 있었다. 공장과 공장을 이어주는 별별 유통상인들도 덩달아 부자가 됐다. 이 틈바구니를 파고든 것이 양복·양장·한복점이다. 자연 김선자, 박동준, 최복호, 전상진, 이영도, 변상일, 김영만, 천상도, 최태영, 김두철, 김우종, 도향호…. 70년대 패션디자이너가 새로운 스타로 등극한다.

자연 중구 내당·계산·남산·달성동과 맞물린 대신동은 금은방거리까지 겸비해 70년대 후반까지 '슈퍼상권'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대구·동아백화점으로 인해 대신동 상권을 넘어섰던 동성로 상권도 그 무렵에는 조족지혈이었다.

직물 도매시장으로서의 기능은 서문시장보다 동산동 일대가 훨씬 앞서 형성됐다. '말전거리'라 불리기도 한 동산동 일대는 일제시대부터 광복 이듬해까지 직물도매시장으로 번창했다. 동산파출소 주변은 직물 도매시장, 약전골목 주변은 직물 소매시장 기능을 했다. 하지만 차츰 봇짐장수들의 몰락이 가속화되고 유통기능은 점차 서문시장으로 통폐합된다. 이 과정에 비정상 루트로 나오는 면사, 나일론사 등이 거래돼 한때 서문시장이 '블랙마켓'이라는 오명이 붙여지기도 했다.

섬유 때문에 덩달아 식당업도 호황을 누린다. 59년 계산동에서 한국 최강 불고기집 '땅집'(대동면옥 바로 옆)이 생겨난다. 그 식당은 대구섬유가 태동시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척에 있는 대신동 동산약국 뒷골목은 전국 최강 갈비골목으로 번창한다. 61년 생긴 '진갈비'는 대구 갈비의 출발점이 된다. 요지 중 요지였던 대신동 네거리에는 대구은행과 동산약국이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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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섬유박물관 산업관 내 제일모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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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양말로 등극된 추억의 나일론 양말.


◆화섬의 도시 대구

한국 전통 천은 베틀에서 생산된다. 이 전통적인 직조공정을 '길쌈'이라 한다. 크게 네 종류가 있다. 삼베, 모시, 명주, 고려 때 생겨난 무명, 그리고 광복 직후 나일론 등 합섬섬유가 신드롬을 일으키기 전 60년대 초까지 영주시 풍기읍의 명물이었던 인견 등이 다섯 번째 주요 원사였다. 삼베는 대마초, 모시는 모시풀, 명주(비단)는 누에고치, 무명(면)은 목화솜으로 만든다. 특히 인견은 '인조견직물'의 준말로 영어로는 '비스코스 레이온'으로 면 조각이나 나무 및 종잇조각을 화학용제로 녹여내 실로 뽑아낸 재생된 반합성섬유다.

인공섬유의 양대산맥은 화섬과 합섬. 화섬은 '화학섬유직물'의 준말로 석유에서 추출된 나일론, 폴리에스테르, 아크릴로 만든 실이다. 합섬은 화섬이 진화한 형태. 폴리에스테르와 모를 6대 4 등 일정 비율로 교직된 것으로 일명 '혼방'으로 불려 이후 양복천의 대명사가 된다.

제일모직 파워는 찬란했다. 그 시절 양복을 맞추려면 마카오에서 양복지를 수입해 해입었다. 대다수 사내는 군복, 미군 담요 등을 갖고 양복을 해 입었다. 삼성그룹의 태두인 이병철은 한국에 새로운 양복지 시장을 위해 55년 북구 침산동 대구삼성창조경제혁신센터 23만㎡ 부지에 제일모직 대구공장을 준공한다. 56년 그 유명한 국산 양복지 '골덴텍스'를 출시한다. 68년에는 경산공장에서 엘리트 학생복지를 만들어낸다. 거기서 제일합섬이 태어난다. 제일모직 덕에 서문시장 4지구 원단존이 초대박을 친다.

비슷한 무렵 또 다른 핵펀치 섬유공장이 등장한다. 1957년 삼경물산 경영주 이원만이 동구 신천동 1090번지(지금은 수성구) 대구농림학교 뽕밭 실습지에 한국 나일론(코오롱) 공장을 설립한다. 64년부터 나일론 원사, 71년부터 구미공단에서 폴리에스테르 원사를 생산한다. 대구 주도의 화섬·합섬시대가 개막된다. 나일론 치마저고리, 나일론 양말 등은 새시대의 심벌이었다. 코오롱은 환경을 고려해 74년 구미공단으로 생산기지를 이전한다.

섬유가 돈방석이 되니 자연스럽게 산업체 부설학교까지 생겨난다. 국내 첫 여종업원 기숙사시대를 연 제일모직은 성일여자실업고, 한일합섬은 한일여자실업고, 훗날 영남일보 사주가 되는 갑을방적은 이현여자실업고를 설립한다.

섬유공장 도심 과밀화를 타개하기 위해 공단도 속속 조성된다. 대구에 공단이 처음 조성된 곳은 대한방직이 자리한 침산동 일대. 침산동의 제1공단만으로는 공장수급이 어려워지자 도심의 상가나 주택가에 공장들이 무질서하게 들어서게 됐고 이에 복합 공업단지로 조성한 게 제3공단이다.

◆대구섬유의 시련

서문시장은 급속도로 번창해 68년 직물 도매시장 전국 점유비율이 24.4%, 71년에는 33.7%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섬유산업의 양적 증가는 품질 저하를 초래했다. 원사부족에서 오는 원사파동, 기능공 스카우트의 과열, 동업자 간의 과당경쟁 등이 생산질서를 문란하게 만든다.

서문시장 섬유상권은 80년대로 넘어가면서 서울 동대문시장한테 서서히 자리를 내준다. 전조가 있었다. 68년 서문시장 상인들의 주거래처였던 호남지방에 극심한 흉년이 들었다. 호남 포목상들로부터 물건값을 제대로 못 받은 업계가 연쇄부도를 당한다. 설상가상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경제활동이 서울로 집중된다. 이때부터 대구 직물도 일단 동대문시장을 거쳤다가 다시 대구로 역류되는 비효율적 구조가 형성된다.

또한 70년대 말부터는 대기업 섬유제품이 내수시장에 직접 파고들면서 중소기업 주류인 대구 섬유업계는 수출 중심의 생산전략으로 전환, 내수시장을 등한시한다. 결국 서문시장의 퇴조가 대구섬유 내수의 발판을 무너뜨리는 악영향으로 파급된다.

섬유는 시설과잉에 봉착된다. 그리고 매머드 메이커들은 구미공단으로 속속 빠져나간다. 제일모직은 94년 구미공단으로 거점을 옮겼고 이후 삼성물산에 통폐합된다. 경산 제일합섬은 2000년 워크아웃돼 웅진케미칼에 매각된다. 73년 설립된 효성계열의 동양염공도 2003년 9월 폐쇄된다.

97년 한 섬유전문지를 통해 추정조사된 자료에 따르면 94년 이후 부도난 지역 직물업체는 88개. 보유 직기는 7천여대. 대구 시내 8개 공장 중 하나가 문을 닫은 것이다. 이 과정에 숱한 사장이 고의로 부도를 내고 야반도주를 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대박섬유가 '쪽박섬유'로 추락하는 순간이었다. 위기의 대구섬유, 그 돌파구는 6천800여억원이 투입된 '밀라노프로젝트'였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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