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걸 교수의 오래된 미래 교육] 부모 사랑의 어려움

  • 박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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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5-18   |  발행일 2020-05-18 제15면   |  수정 2020-05-18

어버이날이 들어있는 지난주 일요일에 인터넷을 통해 어느 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다. 그 목사님은 바울이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인 '골로새서'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그리스도교 자녀들은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여야 한다고 했다. 왜 그래야 할까? 그 까닭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단순히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왜 하나님은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식을 기뻐할까?

기독교에서 으뜸가는 효자는 물론 예수다. 그런데 예수에 버금가는 또 한 사람의 효자가 있으니 바로 중국의 순(舜)임금이다. 순임금은 어려서 어머니를 잃었다. 아버지 고수()는 재취하여 새로 아들을 낳았는데 새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이 장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려고 여러 차례 순임금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순임금은 악독한 새어머니에게 끝까지 순종하여 마침내 새어머니의 마음을 돌리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그 효행으로 말미암아 요임금으로부터 두 딸과 함께 천하를 물려받았다.

부모에 대한 순종을 효도라고 한다. 효도는 부모에 대한 순종이기도 하고 또 부모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다. 순종과 사랑의 차이는 무엇일까? 내 마음에서 진정으로 우러나와 순종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와 유교는 왜 부모에 대한 효도를 그렇게 강조하는 것일까? 부모에 대한 효도를 통해 왕과 상전을 공경하게 함으로써 위계적인 봉건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일까? 그렇지는 않다. 부모에 대한 순종과 효도는 나를 극복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부모의 자식 사랑은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반면 자식의 부모 사랑은 본능적인 것도 아니고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다. 이는 동물의 세계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어린아이는 전적으로 부모에 의존해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아이가 점차 성장하면서 점차 부모에게 반항적으로 변한다. 에고가 크고 단단해지기 때문이다. 성장함에 따라 피부 경계선을 중심으로 그 안쪽을 나라고 생각하는 것에 가장 위협이 되는 것이 바로 부모다. 이런 까닭으로 부모에 대한 순종과 사랑은 에고를 극복했는지를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바로미터가 된다.

예수는 틈만 나면 기도를 통해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하게 해 달라고 빌었다. 죽기 직전의 기도에서도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되 내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기도하였다. 예수는 왜 하나님에 대해 순종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였을까? 왜냐하면 부모에 대한 순종은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결코 성취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의 도움으로만 그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와 순임금을 성인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나'라고 하는 단단한 껍질을 깨고 하나님과 하나 됨을 성취하였기 때문이다. 나를 버린 텅 빈 공간에 비로소 하나님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진정한 나는 텅 빈 허공과 같아 그곳에서 모든 느낌과 감정과 생각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존재이다. 그것이 가능한지 여부를 시험하는 시금석이 바로 부모에 대한 순종이요 사랑인 것이다.

정재걸<대구교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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