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숙의 실과 바늘 이야기] 색동옷 입은 목각인형과 전쟁고아의 아픈 역사

  • 임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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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6-26   |  발행일 2020-06-26 제38면   |  수정 2020-06-26
한복 인형옷 고이 담겨진 한통의 편지
1965년 美 오하이오주 캐더린에 우송
고아 직업훈련·후원자 연결 프로그램
해외 기부자들에게 보내진 전통인형
아이들의 영적인 부모가 되어준 '영친'
옷 색감에 담겨진 소녀의 따뜻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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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동옷 입은 소녀 목각인형 저금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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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트로 만들어진 목각인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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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소인이 찍힌 한복 인형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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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금통 안의 인쇄물과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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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숙(박물관 수 관장)

지금 접시꽃이랑 봉숭아꽃이 한창이다. 박물관으로 따라 들어오는 골목길에도 분홍빛 접시꽃이 절 담장을 넘겨다보며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담장 아래엔 봉숭아꽃도 피어있다. 봄부터 담장 옆에 차를 세울 수 없도록 화분을 놔둔 것을 간간이 보며 오갔는데, 어느 날 꽃대가 훤칠하게 올라오더니 접시꽃이 피었다. 스님이 접시꽃이랑 봉숭아꽃을 좋아하시나 보다. 이 꽃들은 유난히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중학생 때 토요일의 오전수업을 마치고 할머니 댁 가는 일은 늘 마음 설레는 일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시외버스터미널인 옛 대구 남부정류장에서 버스를 탔다. 맨 뒷좌석에 앉아 달리다 보면 비포장된 울퉁불퉁한 길 때문에 머리가 가끔 버스의 천장에 닿을 때도 있었다. 그 속도만큼 빠르게 뽀얀 먼지는 내내 버스를 따라다녔다. '신작로'라고 불렀던 길을 따라 열녀각 앞에 버스가 멈추어 섰다. 아직 오후의 햇살이 넉넉히 남아있는 여름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밤이면 무서웠을 비각을 뒤로하고 방금 모내기를 끝낸 논 사이의 마을 길을 한참 걸어간다. 물이 담겨있는 논들, 그 위로 하늘의 뭉게뭉게 피어난 흰 구름은 또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행복은 그런 순간에 있었던 것 같다.

마을은 동그스름한 산을 뒤로하고 비스듬한 경사면에 있어서 신작로의 버스에서 누가 내렸는지 담장 너머로 훤히 보인다. 마을 사람들은 내리는 사람들이 점처럼 작게 보여도 가방을 들고 또 한손에는 작은 보자기를 든 단발머리 여학생이 누구네 손녀인지 다 알고 미처 할머니가 모르실까 봐 논일을 하다가도 달려가서 일러주신다. 그 풍경 속에 동네 길을 들어서면 키 큰 접시꽃들이 먼저 반겨주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환하고 투명했으며 밝았었다.

누구에게나 지워지지 않는 행복으로 기억되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내게는 유월의 물 담긴 논길을 지나 마을 어귀로 들어설 때 접시꽃 키보다도 작은 할머니가 굽은 등 위로 하염없이 흔들어 주시던 손이다. 모든 절망에 맞설 강력한 '행복한 기억'이 있다면 아마도 그때일 것이다. 앞뒤의 나뭇잎 색이 달라 뒷면의 흰색이 언뜻언뜻 보일 때마다 은전이 찰랑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 같았던 포플러나무 수천 그루가 한꺼번에 손 흔드는 것 같은 환호였다.

지금도 어쩌면 악마의 주술에 걸린 것처럼 헤어 나올 수 없는 현실이 있다 하더라도 '그 행복한 기억'의 주문은 이 엉킨 실타래들을 풀어 줄 것이라 믿는다.

접시꽃이 아니더라도 이처럼 느닷없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한 것은 1965년의 소인이 찍힌 한 통의 편지였다. 두툼한 봉투 속에는 놀랍게도 자그마한 예쁜 한복 인형 옷이 들어있었다. 55년 전의 편지이니 참 오랫동안 간직된 물건이었다.

그 봉투 속에는 편지 대신 가로 8㎝ 세로 28㎝의 길이로 접힌 한복 인형 옷이 얇은 비닐에 쌓인 채 들어있었고 고급스러운 재질의 봉투 겉면에는 주소가 정교하게 인쇄가 되어있어서 궁금증을 일게 했다. 비닐을 벗기고 조심스럽게 펼쳐본 인형 옷의 저고리에 오래된 기계 타자기로 찍혀 있는 몇 개의 문장이 정보의 모두였다. 그 종이는 실로 꿰매어져 옷에 잘 붙어 있었다. 속을 펼쳐 살펴보니 치마의 어깨끈을 붙여둔 서툰 바느질 솜씨가 느껴졌지만 정성을 다한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한국에서 만들어진 이 인형 옷이 그 당시에 미국의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오하이오주 '캐더린 리'에게 보내지게 되었는지 궁금하였다. 타자기로 친 기록에는 한국의 컴패션(Compassion·영친 소녀들의 직업훈련센터)에서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컴패션은 지금도 운영되고 있는 '위탁 입양 영친운동'을 전개하는 비영리단체다.

그래서 이 한 벌의 애틋한 한복 인형 옷이 당시 전쟁 때문에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 만든 옷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한국 복식의 목각인형들이 한국이 아니라 미국 땅에서 유물로 나오는 것이 일련의 일들과 연관이 되었다.

처음 이 목각인형들을 만났을 때에는 손가락 크기 정도의 작고 오밀조밀한 인형들이 관광 상품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했다. 가끔 인형의 바닥 밑면에 '부산역전 조선 물산 상회'라는 소인이 찍힌 것이 발견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유물들은 한국의 작은 목각인형들의 귀한 가치에 관심을 둔 수집가들이 외국 사이트에서 한두 개씩 모으고 사들인 열정 때문에 비로소 우리나라에 남아있게 되었다. 이렇게 한두 점씩 수집한 목각인형들은 '한국근대목각인형'(강경숙 남영자 著, 2018)으로 발간되기도 하였다. 이 목각인형 중 독특하게 유리병으로 제작된 저금통이 있었는데 그 속에는 전쟁고아들을 위해 하루에 1페니씩 모아주기를 호소하는 글이 붙어있었고 그 병 안에는 당시 전쟁고아들의 사진도 들어있었다. 후원을 하는 기부자에게는 8종류로 제작된 목각인형을 보내주겠다는 것이었고, 그 인형들은 전쟁고아들이 직접 만들었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즉 고아들의 직업교육과 후원자들을 연결하는 프로그램이었던 것이다.

이 한복 인형 옷도 그런 맥락에서 한국의 '영친소녀 직업교육센터'에서 만들어져서 미국의 '캐더린 리' 후원자에게 보내졌던 것이다. 한복 저고리에 붙어있었던 첫 문장의 'Young chin'은 아이들의 영적인 부모가 되어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직업교육프로그램과 후원 운동은 1952년 군대의 선교를 위해 한국에 온 에버렛 스완슨(Everett Swanson) 목사가 만들었다. 그는 선교를 위해 왔으나 배고프고 헐벗은 전쟁터의 고아들을 먼저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이 '영친 운동'은 한국에서는 탤런트 신애라씨가 후원자로 어린이들을 10명이나 후원했다고 알려진 NGO다.

한복 인형 옷과 전통복식 목각인형들의 생산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아픈 역사를 돌아보게 된다. 아직도 그 소녀들은 이 땅 어딘가 살아 있을 것이다. 생생한 옷의 색감이 그때 그 소녀의 온기와 마음까지 전해주어 가슴이 먹먹해진다.

글을 쓰는 동안 개성공단 남북연락사무소가 폭파되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우리는 아직도 휴전일 뿐이다. 불쑥불쑥 긴장을 늦추지 않을 수 없는 현실들이 눈앞에 나타나고 있다. 목각인형과 한복 인형 옷들을 만들어 따뜻한 손길을 내민 후원자들에게 애틋하게 보내졌던 이 유물들을 다시 상자에 조심스럽게 넣는다. 꼭 기억해야 할 역사들을 기억하고 다시는 그런 불행들을 우리의 아이들에게 남겨주지 않기 위해서 소중하게 전해주어야 할 편지이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되면 당연히 허리가 굽는 줄만 알았던 철부지 손녀는 지금 할머니의 굽은 등이 눈에 밟혀 새삼 마음이 아프다. 할머니의 그 환한 미소 뒤에는 전쟁의 모진 날들을 온몸으로 견디어온 세월이 있었고, 그래서 모내기 끝낸 푸른 논 사이로 걸어오는 단발머리 손녀를 보며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모진 세월이 우리 자식들에게는 없어야 한다는 열망까지 보태져서 있는 힘을 다해 손을 흔드셨을 것이다.

박물관 수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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