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가기 딱 좋은 청정 1번지 영양] <12> 감천마을과 시인 오일도, 그리고 감천측백수림

  • 류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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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11-30   |  발행일 2020-11-30 제11면   |  수정 2020-11-30
시인 오일도 태어난 400년 집성촌…44칸 생가엔 삶의 체취 물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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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천마을 안쪽에 자리한 연못 '삼천지'. 오래전부터 마을과 함께한 노송과 어우러져 늦가을 풍경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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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천마을 삼천지 제방 둑길. 제방의 경사진 사면에는 노송들이 부드러운 긴장과 열정적인 기울어짐으로 가지를 뻗고 있다.

반변천의 또 다른 이름은 대천(大川) 또는 신한천(神漢川). 그 이름에 큰 기운이 서렸다. 일월산에서 발원한 천은 깊은 골짜기를 이루며 굽이쳐 흐르다가 영양읍의 남쪽에서 초승달을 그리며 서늘한 단애를 세운다. 단애로부터 조금조금 물러난 구릉진 땅에 낙안오씨(樂安吳氏) 집성촌인 감천(甘川)마을이 자리한다. '큰 내가 마을 앞을 흐른다'고 감들내, 감내, 감천이라 했다고 전한다.

#1. 감천마을과 시인 오일도

마을은 양편이 산으로 둘러싸였지만 양지 바른 둔덕이다. 구릉진 땅의 형세 그대로 집들이 들어 앉아 기와를 얹은 흙돌담 길이 부드럽게 울렁인다. 이곳에 처음 터를 잡은 이는 통정대부를 지낸 오시준(吳時俊)이라 한다. 약 400년 전이라 하지만 그가 언제 감천에 정착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577년 9월경 감천마을의 뒷산 너머 청기면에 청계(靑溪) 김진(金璡)이 잠시 우거하고 있었는데, 그때 청계가 서당 건립을 주창하고 오시준 등 16인이 발기해 곡물을 출자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므로 오시준의 감천 입향은 그보다 앞선 것으로 짐작된다. 원래의 땅 이름은 지곡(地谷)이었다고 한다. 오시준이 정착하면서 동곡(桐谷·東谷)이라 했고 정조 연간에는 주자(朱子)의 무이운곡(武夷雲谷)과 닮았다고 해서 운곡(雲谷)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후 마을 뒤 산기슭에 단맛이 나는 좋은 물이 샘솟고 감나무가 많아 감천이라 했다고 전한다.

마을의 한가운데에 44칸 한옥이 있다. 비교적 으리으리한 느낌을 주는 칸 수지만 칸들이 조막만 해 그리 거대하지는 않다. 전체는 'ㅁ'자형으로 경북 북부의 추위를 막기 좋은 구조다. 솟을대문을 가진 5칸 대문간이 꽃과 나무들에 안겨 있다. 지금도 사람이 사는 집이라 일상의 자취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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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오일도 생가. 1901년에 태어난 시인은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며 '억센 항변과 암울한 시대를 한탄하는 시들'을 썼다.

이곳에서 일제강점기의 시인 오일도(吳一島)가 태어났다. 본명은 희병(熙秉)이다. 아버지 오익휴는 천석의 거부로 오일도는 넉넉한 가풍 속에서 자랐다고 한다. 생가는 고종 원년인 1864년 오일도의 조부인 오시동(吳時東)이 건립했다. 오일도는 1901년에 태어나 14세까지 마을의 사숙에서 한문 공부를 했다. 이후 영양보통학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일본 도쿄의 리쿄대학 철학부에서 공부했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시를 썼고 1925년 '조선문단' 4호에 시 '한가람백사장에서'로 등단했다.


조부 오시동이 1864년에 생가 건립
일제말기 한때 절필후 고향서 칩거
마을 연못 '삼천지' 뒤 시공원 조성
천연기념물 114호 측백수림도 희귀


대문에서 정면을 보면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채 오른쪽에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에는 '국운헌(菊雲軒)' 당호와 '한묵청록(翰墨淸綠)' 편액이 걸려 있다. 임진왜란 때 학봉 김성일과 함께 의병활동을 했던 선조 오수눌의 호 '국헌'에 구름 '운'자를 더해 '국운헌'이다. 국화와 같은 절개와 구름과 같은 높은 자유를 뜻하리라 짐작된다.

'한묵청록'은 바른 글을 쓰고자 하는 마음이다. 중문채에 딸린 작은 방은 글방이라 한다. 저 글방에서 오일도가 공부했다. '작은 방 안에/ 장미를 피우려다 장미는 못 피우고/ 저녁놀 타고 나는 간다.'(저녁놀 中) 장미를 피우려던 그 방이 무척 작다.

마을 안쪽에 연못이 있다. 이름은 삼천지, 그 뜻은 알지 못하겠다. 동쪽 제방의 경사진 사면에는 노송들이 부드러운 긴장과 열정적인 기울어짐으로 가지를 뻗고 있다. 깜짝 놀랄 만큼 멋있는 나무들이다. 제방 길은 근래에 정비했지만 연못과 나무들은 아주 오래 마을과 함께한 듯하다. 연못의 오른쪽 가장자리에는 낙안오씨 종택인 감호헌(鑑湖軒)과 사당인 충효사(忠孝祠)가 자리한다. 매일 이 연못에 자신을 비춰 보는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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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도 시공원 입구에는 '지하실의 달' 시비가 있고 그 옆에 시인이 앉아 책을 펼쳐 들고 있다.

연못 뒤쪽에는 오일도 시공원이 넓게 조성돼 있다. '내 연인이여! 가까이 오렴!' '누른 포도잎' '그믐밤' '코스모스' '가을하늘' 등 그의 시를 새겨 넣은 바윗돌들이 나지막한 둔덕들 가운데 서있다. 흔히 오일도를 애상의 가을을 노래하는 서정시인, 고독과 비애의 시인이라 하지만 그에게 있어 서정은 시대의 절망과 상실을 표현하는 시선이었다. 나태주 시인은 그의 시에 대해 '억센 항변과 암울한 시대를 한탄하는 시들'이라 했다.

오일도는 1935년 2월에 사재를 들여 시 전문지 '시원(詩苑)'을 창간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 전문지로 이후 우리 현대시의 발전 속도가 빨라졌다고 평가된다. 그는 '시원'을 통해 많은 시인을 세상에 알렸지만 자신의 시집은 생전 한 권도 출판하지 못했다.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 즈음에 그는 일제의 통제를 절감하며 낙향했다. 그는 절필하고 긴 칩거에 들었다. 광복 후 다시 상경한 그는 '시원'의 복간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우울로 인한 폭음으로 나날을 보내다 결국 죽음을 맞았다. 45세였다. 공원 입구에는 '지하실의 달' 시비가 있고 그 옆에 그가 앉아 책을 펼쳐 들고 있다. '지하실의 달'은 그의 유고시집의 제목이기도 하다. 책을 읽고 있는 그는 오늘도 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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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기념물 제114호로 지정된 감천측백수림은 다양한 수목과 어우러져 계절마다 다채로운 풍경을 연출한다.

#2. 감천측백수림

감천마을 앞에서 들을 가로질러 천변으로 간다. 천변에는 소나무와 느티나무의 숲이 펼쳐져 있다. 숲은 감천마을에 살았던 침벽 오현병이 1959년경 무와 문예, 풍류의 수련도장으로 조성했다고 한다. 이후 후손들이 그의 뒤를 이어 정성으로 가꾸었다. 지금은 침벽공원 또는 감천 유원지라 불리며 캠핑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숲 맞은편은 높고 긴 단애다. 그 수직의 절벽에 측백나무가 자생하고 있다. 모감주나무, 털댕강나무, 삼나무, 단풍나무, 산벗나무 등도 함께 어우러져 있어 계절마다 다채로우면서도 늘 푸르다. 우리나라에는 측백나무 자생지가 극히 드물다. 특히 이와 같은 집단적 자생은 다른 지역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어 식물학상 희귀한 경우다. 깊은 물과 높은 절벽이 나무들을 보호하니 사람의 손이 닿기 어려웠고, 그로 인해 귀하게 보존되었다. 감천의 측백나무 숲은 천연기념물 제114호로 지정돼 있다.

나무들은 지름 10㎝ 내외에 높이 3~5m 정도로 날씬하고 천의 건너편에서도 건강함이 느껴질 만큼 생육 상태가 좋다. 측백나무는 예로부터 신선이 되는 나무로 귀하게 대접받아 왔다. 특히 이곳의 측백나무는 만병통치약으로 이용되기도 했는데 측백나무의 가지와 잎을 삶아 먹으면 부인병에 좋다는 소문이 나 멀리서도 구하러 오는 이가 많았다 한다. 그러면 마을의 힘센 젊은이가 허리에 새끼줄을 감고 한 손에는 낫을 들고 반변천을 헤엄쳐 건넌다. 그리고는 간신간신 절벽을 올라 꼭 필요한 만큼의 가지를 베었다.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젊은이도 병자도 모두가 무사하기를 간절히 빌었다고 한다.

숲 속 어디에서나 절벽의 측백나무 숲이 보인다. 눈앞에 있으나 천리만큼 멀다. '내 연인이여! 좀 더 가까이 오렴/ 지금은 애수의 가을, 가을도 이미 깊었나니… 내 연인이여! 좀 더 가까이 오렴/ 지금은 조락의 가을, 때는 우리를 기다리지 않는다.'(내 연인이여! 가까이 오렴 中) 이제 곧 낙엽도 지고 잡히지 않는 측백의 푸름만이 남겠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영양군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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