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원자력 신도시의 꿈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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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1-11   |  발행일 2021-01-11 제26면   |  수정 2021-01-11
세계 5위 핵발전국인 한국
폐기물 저장고 짓지 않은 채
무작정 핵발전소부터 지어
최소 20년 걸리는 폐쇄과정
독일식 매뉴얼이라도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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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창 문학평론가 전 영남대 교수

평화운동가 송강호 박사가 최근 문재인 대통령에게 원전 찬성론자만 모여 사는 원자력 신도시를 짓자고 제안하는 편지를 보냈다. 영화배우 송강호와 이름은 같지만, 독일 신학박사인 그는 강정 해군기지에 무단 침입해 구럼비 바위에서 평화를 기원하는 기도를 드리려다 징역 2년형을 받고 제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다.

송 박사는 편지에서 원전을 종교처럼 굳게 믿는 정치인과 언론인, 과학자들과의 소모적 논쟁과 정치적 대결로 국력을 허비하지 말고 원자력 신도시를 만들어 그곳에 원전을 찬성하는 정당의 당사와 언론사의 사옥, 원자력발전소, 원자력 폐기물 저장고, 원자력 산업단지 등을 마음껏 지을 수 있게 허락해서 그들의 한을 풀어 달라고 호소했다. 송 박사가 붙인 이 원자력 신도시의 이름은 '무저갱(無底坑·abyss)', 즉 바닥없는 구덩이다. 성경의 묵시록에 나오는, 악마를 천년 동안 감금하는 지옥을 가리킨다.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 24개의 핵발전소를 가진 세계 5위의 핵발전 국가다. 그중 대부분이 지진과 해일에 취약한 동해안, 특히 경북 동해안에 밀집돼 있다. 송 박사의 꿈이 실현된다면 무저갱 원자력 신도시는 핵발전소 밀도 세계 1위인 경북에 들어설 가능성이 크다. 원전교 신도들은 '핵발전소'라는 말 대신에 '원자력발전소(원전)'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핵'보다는 '원자력'이 좀 더 안전하고 긍정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울대 원자력공학과는 영어로 'department of nuclear engineering'(핵공학과)으로 표기하고 있으니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고준위 핵쓰레기(사용후 핵연료)를 안전하게 보관할 저장고를 짓지 않은 채 무작정 핵발전소부터 지었다는 사실이다. 아파트를 지을 때 화장실을 만들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핵쓰레기장을 짓는 비용과 핵쓰레기를 10만년 동안 보관하는 비용, 핵발전소를 폐기하는 비용은 계산하지 않은 채 이들은 원자력 발전은 경제적이고 안전하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원자력발전은 하나님이 내려주신 은총"이며 "실제로 지난 40여 년간 원전 사고가 단 한 건도 없었다"는 맹성주(전 서울 강남구청장) 소망교회 집사의 발언은 신앙고백처럼 들린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의 핵발전소 참사에 뒤이어 최근에는 월성원전 주변의 지하수가 방사능 누출로 오염됐다는 언론보도가 충격을 준다. 그런데도 카이스트 학생들은 원전 증설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 대학의 원자력 및 양자공학과에는 핵발전소 폐기에 관한 과목이 없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는 핵발전소 폐기에 관한 법률이나 매뉴얼도 없다. 몇 년 전 시민단체의 부탁으로 독일 정부의 핵발전소 폐기 매뉴얼을 번역하면서 나는 이런 기초적인 작업도 하지 않은 이른바 전문가들을 원망한 적이 있다.

이제 우리도 독일처럼 핵발전소 존폐에 관한 결정 과정에는 이런 게으르고 무책임한 전문가들이 아니라 일반 시민이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 핵발전소는 국민 전체와 후손의 안전에 관한 문제이므로 이해관계에 휘둘리는 핵마피아나 이들을 옹호하는 정당이나 언론, 무사안일주의에 젖어 있는 관료, 국가의 미래를 좌우할 중요한 정책을 실정법의 법조항으로만 재단하는 판·검사들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 탈핵에너지 학회, 녹색당 등 관련 기관과 주민 대표, 탈핵운동가들이 참여해 정책을 결정하고 최소 20년이 걸리는 핵발전소 폐쇄 과정도 시민 대표가 감시하도록 하는 독일식 매뉴얼이라도 서둘러 마련해야 할 때다.
정지창 문학평론가 전 영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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