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모로코 페스

  • 유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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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2-05   |  발행일 2021-02-05 제36면   |  수정 2021-02-05
미로 같은 골목에서 길을 잃어야 하는 도시, 그래야 새로운 길과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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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나 너머로 보이는 세계 최초의 대학 카라위인 모스크의 미나레트.

사실 모로코 여행이 내 버킷리스트에 들어오게 된 것은 순전히 페스라는 도시 때문이었다. 오묘한 붉은 벽을 따라 어지럽게 꺾이는 골목길, 그 골목을 빼곡히 메운 이상한 물건들, 그 공간을 따라 흘러 다니는 사람 물결, TV 화면을 통해 처음 접한 이상한 풍경과 영상조차 이리저리 흔들리는 이 미로 같은 골목이 사실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일부러 만든 것이란 설명이 이어지면서 언젠가 저곳을 가보리라 결심했던 것 같다.

페스는 모로코에서 카사블랑카, 마라케시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도시다. 모로코의 수도 라바트에서 동쪽으로 160㎞ 거리에 있는 페스는 801년 이드리스(Idrisid) 왕조의 수도였던 곳으로, 이 시기부터 마그레브(아프리카 북서부) 지역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였다. 중세시기 이슬람 세계는 유럽과 달리 지식이 축적되면서 다방면에서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페스는 이슬람 지성계의 중심지였다. 세계 최초로 대학이 세워진 이 도시에서 학문과 기량을 갈고닦은 수학자와 과학자, 철학자들이 이베리아 반도로 건너가 유럽의 지성계를 흔들어 깨웠던 것이다. 페스는 1296년에 마린 왕조가 수도로 정하면서 최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마린 왕조는 베르베르인의 한 갈래인 제나다족이 아틀라스 산중에 세운 왕조로 14세기에는 마그레브 전역을 지배하면서 1470년까지 존속했다.


카사블랑카·마라케시 이어 세번째 대도시
중세 이슬람 문화·지성계 중심지 최전성기
859년 개교 세계 최초 대학 카라위인 모스크



이처럼 페스는 이슬람 세계의 종교와 예술, 학문의 중심지이자 모로코에서 가장 역동적인 도시다. 두 왕조의 수도였으므로 역사도시로서의 면모도 간직하고 있다. 페스의 구시가지 메디나는 1200년 전의 이슬람 왕조시대의 정취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페스는 이러한 역사적 지역을 중심으로 세 구역으로 나뉜다. 오래된 페스를 뜻하는 '페스엘발리', 새로운 페스 '페스엘제이디드', 프랑스 식민통치 시절에 건설된 신시가지 '빌라누벨' 등이다.

페스에서의 숙소는 신시가지 빌라누벨 지역의 현대식 호텔을 잡았다. 사하라 투어의 피로를 풀고 싶었던 것이다. 높지 않은 크기에 모로코 전통 가옥을 닮은 이비스 호텔은 야자나무에 둘러 싸여 있었다.

다음날 생각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생각도 몸을 따라가나 보다. 푹 쉬고 싶다던 '생각'은 몸이 좋아지자 나가고 싶어 했다. 빌라누벨의 거리는 잘 정돈되고 길도 넓었다. 이 메디나의 도시에서는 운전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구글맵을 켜고 천천히 걸었다. 메디나로 들어가기 전 먼저 들른 곳은 페스 왕궁이었다. 1000년 넘는 역사의 이 궁전은 현재 모로코의 왕 모하메드 6세의 금장식 문으로 유명하다. 2009년 판 '론리 플래닛'은 바로 이 문의 사진을 표지로 사용하였다. 궁궐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이른 아침인데도 벌써 관광객이 모여들었다. 번쩍거리는 황금빛이 한껏 왕조의 위세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더욱 인상적이었던 것은 문주를 두른 이슬람 문양의 타일 장식이었다. 스페인 알람브라 궁전의 타일 못지않은 정교함과 우아함이 있었다. 전통가옥 리야드에서 일반 타일 장식과는 확연히 다른 예술미가 느껴졌다. 금장식이 위엄을 과시하는 것이라면 타일 장식은 품위를 드러내는 것 같았다. 구시가지 엘발리 방향으로 걸어가다 보니 무성한 선인장과 야자나무 섬이 있는 즈난 스빌(Jnan Sbil) 공원에 닿았다. 엘제이디드 지역에 있는 이 공원은 원래 18세기에 물레이 압달라 술탄이 조성한 왕가 전용 정원이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폐허로 방치되다가 모하메드 6세 왕의 뜻에 따라 재정비하여 2011년에 시민들에게 개방하였다. 7㏊의 면적에 3천종이 넘는 다양한 식물이 있는 공원은 복잡하고 시끌벅적한 메디나와 대조되는 여유있고 안락한 휴식 공간이었다. 특히 호수 한가운데 떠있는 듯한 야자나무 섬은 물에 비친 실루엣과 함께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들어냈다.


佛 식민지 시절 건설 신시가지 '빌라누벨'
이슬람 왕조 정취 보존 구시가지 '메디나'
좁은 미로와 같은 수천개의 골목으로 빼곡
15만명이 드나드는 주 출입문 '부 즐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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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나의 미로 같은 골목의 중요 운송수단인 리어카.

엘발리 지역으로 들어서면서 거리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엘발리는 페스의 가장 큰 메디나로 이드리스 왕조가 세운 수도의 모습을 수많은 기념물과 함께 보존하고 있는 중세 도시다. 메디나 전체가 띠를 두른 듯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좁은 미로와 같은 수천 개의 골목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기 때문에 자동차 통행도 금지되어 있다. 이 골목 안에 15만여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이곳의 주 출입문이 남서쪽의 부 즐루드(Bou Jeloud) 문, 즉 블루게이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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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발리 메디나의 블루게이트.

페스 메디나의 시작은 누구나 블루게이트에서 시작한다. 이 문 안으로 이슬람 세계의 학문 중심지답게 수많은 사원과 학교가 남아있다. 대학에 몸담고 있으니 적어도 859년에 개교했다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카라위인(Kairaouine) 모스크와 14세기에 설립된 메린 왕조시대의 신학교 보 이나니아(Bou Inania)는 꼭 가보고 싶었다. 푸른 타일로 장식된 블루게이트는 생각보다 크고 화려했다. 우리도 이 문에서 시작해 보 이나니아와 네자린 궁전을 지나 카라우인까지 걷고, 북동쪽의 소피텔 팔레 자마이로 나갈 계획이었다. 블루게이트를 넘기까지는. 계획은 골목을 들어서자마자 어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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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나 안의 전통시장.

메디나 안은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모를 정도로 온갖 진기한 물건이 즐비한 거대한 시장이자 인종 전시장이었다. 우리 일행은 블루게이트에 들어서자마자 첫 번째 가죽옷 가게에 발이 묶여버렸다. 가죽 제품 쇼핑은 페스가 최고라는 말이 실감났다. 나쁘지 않은 품질에 놀랄 정도의 싼값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나도 재킷 두 벌과 벨트 3개를 샀으니 말이다. 나머지 일행들도 나와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한 가게에서 두세 시간을 보냈나 보다. 점심때가 훌쩍 지나 있었다. 이제 이곳 메디나 투어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쇼핑이었다. 여자들은 여자들대로 액세서리· 가방·골동품 가게 등으로 몰려다녔고, 남자들은 남자들대로 진기한 물건에 이끌려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더 이상 예정된 투어는 불가능했다. 이 또한 여행의 한 방식이었다. 구글맵을 끄고 나도 끌리는 대로 발을 옮겼다.


진기한 물건 즐비한 거대시장과 같은 풍경
중세 방식으로 작업, 세계 최고 품질 가죽
쇼핑객이 꼭 사야하는 아이템 '아르간 오일'



모로코에서 꼭 사야 하는 쇼핑 아이템은 가죽 제품 외에도 아르간 오일이란다. 가짜가 많으니 진품을 사야 한다는 미션을 받고 가게를 찾아다녔다. 한 가게에 가니 그렇게 못 믿겠으면 눈앞에서 직접 짜서 담아주겠단다. 가장 믿음직스러운 제안이었다. 일행 모두의 주문을 받으니 양이 꽤 많았다. 바르는 건지 먹는 건지도 모를 이 오일을 짠다고 가게 앞에 지키고 섰다. 주인도 신경이 쓰였던지 간이의자를 내주며 앉으란다. 그렇게 본의 아니게 그 골목에서 가장 한가한 여행객이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골목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호객꾼은 기가 막히게 팔랑 귀 손님을 골라온다. 주인은 너스레를 떨며 흥정을 한다. 호객꾼과 주인 사이에서 손님은 흡족하게 함박웃음을 짓는다. 세 사람 모두 만족한 거래다. 이곳에서는 어떤 물건을 사도 만족스럽다. 그만큼 저렴하다는 것이다. 단, 다른 가게와 가격 비교만 하지 않으면. 그 옆 가게에서는 화려한 원피스로 멋을 낸 뚱뚱한 아주머니가 웬 사내를 호되게 나무라고 있다. 보나마나 부부겠지. 남자는 가게로 들어오며 안기는 아이 덕분에 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아이는 엄마 원피스 뒤로 몸을 숨기며 빙그레 웃는다. 노새를 끌고 가는 할아버지는 노새만큼 등이 굽었다. 이마에 패인 세월의 흔적은 골목만큼 깊어 보인다. 귀를 닫으니 눈이 밝아온다. 사람들의 표정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쇼핑을 마친 일행들이 아르간 가게로 모였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그래도 테너리는 봐야 할 것 같았다. 아까부터 나를 호기심 있게 바라보며 말을 걸던 호객꾼에게 테너리를 소개해달라고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반색을 한다.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가죽제품 가게에 딸린 테너리였다. 테너리는 가죽 작업장을 말한다. 북부 아프리카와 남부 유럽을 연결하는 무역 중계도시로 발달한 페스는 수천 년 전부터 가죽을 생산해왔다. 세계 최고 품질로 꼽히는 페스의 가죽은 '말렘'이라고 불리는 가죽 장인이 털을 벗기는 일에서부터 무두질과 염색까지 중세 시대 방식으로 작업을 한다. 비둘기 똥이나 소의 오줌, 동물 지방, 재와 같은 천연재료를 염색재료로 쓰는 만큼 이곳의 냄새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독하다. 그래서 보통 박하 잎으로 코를 막고 작업장을 구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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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응상 (대구대 교수)

옥상으로 올라가니 메디나의 전체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멀리 세계 최초의 대학 카라위인 모스크 미나레트가 우뚝하니 솟아 있었다. 옥상 아래 테너리는 작업이 끝난 뒤라 생각만큼 냄새가 독하지는 않았다. 커다란 팔레트처럼 색색의 물감 웅덩이가 이채로웠다. 들여다보는 우리는 구경거리지만 저 악취 속에서 붓처럼 휘적휘적 색을 입히는 노동자들은 삶이자 생활일 것이다. 여행가 김남희는 페스를 "세상의 모든 여행자들이 길을 잃기 위해 찾아드는 도시"라고 했다. 페스에서는 길을 잃어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길이 나타난다.

대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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