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선비사회의 미움과 사랑

  • 유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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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2-26   |  발행일 2021-02-26 제35면   |  수정 2021-02-26
실록에 '유배' 3200회 등장, 골치 아픈 신하는 섬으로…
개인의 원수는 가문의 원수 "혼인 말라" 대대손손 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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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선의 왕들은 중국 황제를 따라한다고 걸핏하면 신하를 귀양 보냈다. 조선왕조실록에 귀양이란 단어가 5천여회, 유배가 3천200여회 나온다. 사진은 유배떠나는 모형.

역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신들의 이야기인 신화와 달리 역사 속에는 인간 심성이 알알이 박혀 있다. 임금에게 미움을 받으면 유배를 갔고 집안 간 원한이 맺히면 왕래를 끊고 담을 쌓았다. 이를 '세혐(世嫌)'이라 하여 기록으로 남겨 후손에게 전했다. 옛사람의 인생사에도 사랑이 넘쳤다. 은혜를 입으면 꼭 보답하려 했고, 어려운 이들에게 베푸는 마음이 고결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집안 간 인연을 '세의(世誼)'라 하여 고귀하게 여겼고 한 번 맺은 인연은 누대에 걸쳐 간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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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作 '세한도'

◆유배는 왕조 통치술

고려·조선의 왕들은 중국 황제를 따라한다고 걸핏하면 신하를 귀양 보냈다. 조선왕조실록에 귀양이란 단어가 5천여 회, 유배가 3천200여 회 나온다. 유배지는 수도를 기준으로 멀면 멀수록 급이 높았다. 제주도 대정이 가장 멀었는데 김정희와 정온이 귀양살이했다. 경상도도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므로 많은 선비가 유배를 왔다. 정몽주가 언양, 윤선도가 기장, 정약용은 장기, 송시열은 장기와 거제, 권근이 영해, 이색이 평해, 이극균이 구미, 민무질이 태종 때 대구로 유배를 왔다. 숙종 때 영의정 남구만은 남해 등지에서 4번, 김춘택은 5번이나 귀양살이했다.

골치 아픈 신하는 '절도 안치'라 하여 섬으로 유배를 보냈다. 김만중은 남해 노도, 노수신은 진도, 정약전은 흑산도, 이광사는 신지도, 최익현은 대마도로 보냈고, 영조는 이인좌난 연루자 16명을 서해 고군산군도로 단체 유배 보냈다.


조선시대 유배 문화
수도에서 멀수록 무거운 형벌
경상도로 내쳐진 선비들 많아
유배기간에 첩 얻어 자식 낳고
본가 가족·노비 데리고 가기도
유배지에 제자들 몰려와 修學
송시열 영향…포항에 서원 7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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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시 남구 장기면에 조성된 유배문화촌 전경. 장기면으로 유배온 대표적 인물은 송시열·정약용 등이다.

유배 기간도 한 달부터 20년까지 다양했다. 20년 유배 생활한 인물은 명종조 양재역 벽서사건의 노수신과 유희춘이고, 정약용 18년, 윤선도 16년, 서성 11년, 정온 10년, 김정희 9년, 송시열은 5년을 귀양살이했다. 열악한 환경으로 많은 선비가 배소에서 목숨을 잃었고 풍토병을 염려해 이배가 잦았다.

기약없는 유배 생활에 현지 양반의 서출을 첩으로 얻어 자식을 낳기도 했으며 송시열은 아예 본가의 식솔과 노비를 데리고 다녔다. 유배 시 나이도 천차만별이었다. 갑자사화로 연루돼 조부 이세좌와 함께 귀양 간 이연경은 10세였고 숙종조 기사환국 때 제주도로 유배 간 송시열은 8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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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를 떠난 선비들은 장기간 유배생활에 살아남기 위해 즐겁게 지내려고 노력했다. '적거사미(謫居四味)'라 하여 맑은 새벽에 머리 빗는 맛, 늦은 아침을 먹고 천천히 산보하는 맛, 환한 창가에 앉아 햇볕을 쬐는 맛, 등불을 밝히고 책을 읽는 맛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선비들은 유배지에서 제자를 가르쳤다. 정약용의 강진 제자들은 다산학단을 만들어 지역사회에 문풍을 일으켰고, 포항 장기로 3년7개월간 유배되었던 송시열의 영향으로 장기에 서원이 7개나 생겼고 노론세가 강했다. 청도 선비 박태고는 송시열을 찾아 거제도까지 가서 제자가 되었다.

장기간 유배생활에 살아남기 위해 유배지에서 즐겁게 지내려고 노력했다. '적거사미(謫居四味)'라 하여 맑은 새벽에 머리 빗는 맛, 늦은 아침을 먹고 천천히 산보하는 맛, 환한 창가에 앉아 햇볕을 쬐는 맛, 등불을 밝히고 책을 읽는 맛으로 마음을 다스렸고 서화를 일로 삼아 불후의 작품을 남겼다.

◆가문의 원한은 대를 잇고

개인에게 원한이 생기면 가문 전체가 원수가 되었다. 집안끼리 원한인 세혐이 왕조실록에 30번이나 나오니 사대부 사회에서 익숙한 듯하고 세혐 집안의 인물이 조정의 같은 부서에 보임되면 사임하거나 보직을 바꾸어 달라고 청했다.

숙종실록에 따르면 1703년 양주조씨 조태채가 이조참판이 되자 이조판서인 청풍김씨 김구와 세혐이 있다 하여 등원을 거부하자 숙종은 세혐이 너무 지나치다면서 이조참판을 광산김씨 김진규로 교체하고 조태채를 호조판서로 보임했다. 오십년 전 김구의 부친이 조태채의 조부를 탄핵했기 때문이다. 두 집안 모두 노론 명문가다.

세혐이 있는 집안과 인연을 맺을까봐 기록으로 남겨 후손에게 전했는데 이를 '세혐록'이라 했다. 세혐록은 심환지 집안에서 나왔다.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는 청렴하게 살았으나 소론과 기호 남인, 노론 시파와 치열하게 싸워 사후에 관직이 삭탈 당할 정도로 적이 많았다.


집안 간 원한 '세혐'
"82세 노모와 8세 손자 죽여"
광산이씨, 정철과 철천지 원수
청송심씨는 반남박씨와 세혐
조정서 같은 보직 기피·사임
기록·유언 남겨 후손에 전해



역사적으로 세혐의 관계를 넘어 견원지간이 된 집안도 있다. 1589년 선조 때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났는데 위관(임시 재판장)이 정철이었다. 서인 정철은 동인 광산이씨 이발을 문초하면서 그의 82세 노모와 8세 손자까지 죽여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이 원한이 수백 년을 내려와 아직도 전라도 광산이씨 집안은 정철에 대한 원한을 잊지 못한다고 한다.

경상도 칠곡의 이담명은 1680년 경신환국에 이조판서였던 아버지 이원정이 장살로 죽임을 당하자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대사헌·이조참판 직에 있으면서 노론의 민정중과 김수항을 사사시켜야 한다고 수차례 간언한 것이 숙종실록에 남아 있다.

세종 때 소헌왕후 심씨가 왕비가 되자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때 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태종은 외척 발호를 염려해 중국으로 사신 갔다 오는 영의정 심온을 잡아 사사시키는데 심온은 이 간계를 좌의정 반남박씨 박은이 사주한 것이라 하여 청송심씨 심온가는 앞으로 반남박씨와 혼인하지 말라고 유언으로 남겼다고 야사에 전한다.

안동의 명문가 풍산의 하회류씨 집안과 임하의 의성김씨 집안 간 다툼인 '병호시비'와 노·소론 분당의 단초가 되었던 회덕의 은진송씨 송시열과 니산(논산)의 파평윤씨 윤증과의 다툼인 '회니시비'도 역사적으로 안타까운 세혐이다.

◆영·호남 명문가의 우정

임진왜란의 호남 의병장 고경명에게는 여섯 아들이 있었다. 고경명은 호남으로 쳐들어오던 왜적과 맞서 싸우다가 차남 인후와 함께 금산성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사했고, 장남 종후는 학봉 김성일과 함께 진주성을 지키다가 진주성 2차 전투에서 순국했다.


집안 간 인연 '세의'
호남 의병장 식솔 임청각 피란
학봉 김성일 집안서 보살펴줘
훗날 안동부사 부임해 '큰절'


아버지와 두 형이 순절하자 넷째 순후는 난을 피해 막내 용후와 조카 등 80여 명의 가솔을 데리고 큰형수 친정인 안동 임청각으로 피란을 간다. 임청각은 99칸의 대저택이었지만 이미 명군 지휘부가 들어서 있었다. 멀리서 피란 온 고경명의 식솔을 받아들인 곳은 금계의 학봉 김성일 집안과 예안이씨 문중이었다. 학봉이 나주목사 시절 대곡서원을 지을 때 고경명 집안과 인연이 있었고, 특히 진주성에서 김성일과 고종후가 함께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아픔이 있기에 학봉 집안은 고경명 가문의 식솔을 제 식구처럼 보살폈다.

왜적이 물러가자 순후는 고향 광주로 돌아가 집안을 일으켰고 막내 용후는 안동에 남아 공부를 계속해 1606년 대과에 급제했다. 함께 공부한 조카 고부천과 학봉 손자 김시추도 잇따라 급제했다. 훗날 고용후가 안동부사로 부임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학봉 김성일의 노부인과 장손 김집을 찾아가 큰절을 올리며 '어르신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오늘의 제가 있었겠느냐'며 학봉가의 어른을 부모처럼 모시는 일이었다. 호남의 장흥고씨 집안과 영남의 의성김씨 집안 간 우애는 오백년 선비사회의 귀감이 되었다.

◆향리 아들에게 베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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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곡 최석정이 발탁한 향리 집안 권희학은 훗날 종2품까지 올라 조선후기 신분변동의 상징이 되었다. 권희학은 평생 최석정의 은혜를 잊지 않고 의리를 다했다.

숙종 때 영의정을 여덟 번이나 한 명곡 최석정이 1689년에 장희빈 사건으로 이조참판에서 안동부사로 좌천되었을 때 안동 관아에서 향역으로 심부름하던 18세 총각 권희학을 만난다. 아전의 자식으로 정식 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실수를 하지 않고 기억력이 뛰어난 젊은이였다. 총명함과 성실함에 반해 상경할 때 데리고 와서 공부시키고 유수 가문의 자제들과 교유토록 하여 보살폈다.

권희학은 1697년 우의정 최석정이 세자책봉 주청사로 연경에 갈 때 군관으로 수행했으며 이후 교련관이 되었고 3진 첨사를 지냈다. 1728년 이인좌난이 일어나자 금위영 무관으로 도순무사 오명항을 따라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공신으로 책록됐고 화원군에 봉해졌다.

운산군수·장연부사 등 10개 고을의 수령을 맡아 선정을 베풀어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당시 영남 선비들은 과거 급제하더라도 5품 이상 올라가기 어려웠던 시기에 권희학은 종2품까지 올랐다.


'안동에 좌천' 이조참판 최석정
경상도 향리 집안 권희학 발탁
훗날 총애받고 종2품까지 올라
평생 은인에 대한 의리 지켜


67세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안동 풍천으로 낙향했다. 향리 아들이 가의대부(관찰사 품계)가 되어 돌아왔다. 1742년 71세로 세상을 떠나 안동 봉강영당에 모셔졌다. 권희학은 양반들로부터 냉대를 받던 향리 중인에서 최상층 양반이 됨으로써 조선후기 신분 변동의 상징이 되었다. 그의 초상화 화원군 영정과 저술 감고당문적은 유형문화재가 되었다.

그의 호 감고당(感顧堂)은 '고마움을 돌이켜 본다'는 뜻으로 평생 최석정의 은혜를 잊지 않았다. 명곡 사후에도 집안일을 살아 있을 때와 똑같이 맡아 하였고 신분이 높아져 조정에서 상으로 내린 금을 팔아 명곡 향사(鄕祠) 전답을 마련했고 사비로 문집을 간행하기도 했다. 평생 은인에 대한 의리를 다하여 세상은 그를 '진정한 군자'라 했고 명곡 또한 사람을 미리 알아보아 후세인의 본보기가 되었다고 그의 비문에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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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

비문은 그가 운산부사 시절 평안도 절도사로 모셨던 소론의 명재상 귀록 조현명이 정승 시절에 썼다. 경상도 향리집안 출신의 선비 일생에 당대 최고의 영의정 두 사람, 명곡 최석정이 키웠고 귀록 조현명이 아꼈다. 비문의 마지막 부분이다.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는데 귀함도 천함도 없다네/ 눈 밝은 주인을 공으로 보답하니 누가 멀고 누가 가까운가/ 여기 이 돌에 명(銘)하노니 백 세대를 두고 그를 권하네'

여행작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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