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기자의 행간을 찍다] 봄비는 피고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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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4-16   |  발행일 2021-04-16 제38면   |  수정 2021-04-16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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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비 오는 봄거리.

봄의 깊이에 방점 찍는 비. 봄비는 내리지 않고 핀다. 골절된 빗줄기는 속살속살 밤공원 곳곳을 적셔준다. 야음을 틈타 봄비는 고양이 보법으로 밤공원 벤치에 올라가 올망하게 앉아 있다.

대여섯 걸음 떨어진 벤치에 앉은 중년의 남녀가 술기운을 빌려 밀어를 속삭인다. 아니, 속삭임 아니고 '쏟아냄'이다. 남자의 취기가 여자 쪽으로 쓰러지려 한다. 하지만 여자의 취기는 이성의 축에 매달려 있다. 남자는 감성 넘어 어떤 욕정에 압도된다. 욕정과 이성 사이, 빗물이 번진다. 서둘러지는 벚꽃은 봄비에 실려 둘의 발자국을 지워준다. 다시 공원은 적막. 벚꽃과 빗물뿐이다.

스무 살 무렵 부산역 근처 노숙자촌에서 하룻밤을 포갠 적이 있다. 객기를 앞세우고 부랑인들이 모여 사는 텐트촌 입구를 서성거렸다. 그들은 나를 적으로 간주했다. 완벽하게 누굴 부정하는 저 눈빛. 나는 부산 친구한테 선물 받은 나이키 신발을 선물했다. 그들은 잠시 눈을 감아주었다. 나는 동이 틀 무렵 쪽잠을 틀어내고 부산진역에서 출발하는 경전선을 타고 전라도로 건너갔다.

오랜 시간이 지난 또 어느 날, 난 취재 때문에 부산역의 사내 한 명을 알게 됐다. 부산역 노숙자의 인권을 대변하는 이모씨였다. 쇳덩이 같은 야성을 갖고 있었다. 말보다 주먹이 더 이성적이라 여겼던 그는 노숙자를 취재하려면 당연히 노숙자 공간에서 하룻밤 자야 된다고 우겼다. 덕분에 난 부산역 한쪽에 놓여 있는 화장실에서 거북한 잠을 잤다. 실은 거기가 이모씨의 거처였다. 그는 나름 서울에서 잘 나가던 싱어송라이터였다. 하지만 노숙자를 보는 순간 '여기가 자기 삶의 종착역'이라 여긴다. 그날부터 부산역 버스커로 활동하며 노숙자의 병풍 역할을 해주었다. 그의 주먹은 늘 충혈돼 있었다. 종교단체에서 노숙자를 이용해 선교·포교하려는 기색이 보이면 그가 누구든 멱살 잡고 패대기 쳐버렸다. 부산역 증축 과정에 그의 구역도 사라졌고 덩달아 부산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또 한 명의 봄비 같은 사내가 있다. 내가 20대 중반 서울의 모 대학 앞에서 하숙할 때 친해진 목포 출신의 한 셰프였다. 그는 괴테하우스라는 카페 주방장. 잠이 오지 않으면 곧잘 그 집 바텐에 앉아 음악을 감상했다. 그는 내게 삼양골드라면을 곧잘 끓여주었다. 곁들인 시큼한 묵은지…. 송창식의 명곡 중 하나인 '나그네'를 라면 스프처럼 풀어주었다. 모든 게 자신의 연장이라 여기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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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지축으로 살 땐 만나는 족족 인연이다. 하지만 살 만큼 살고 나면 '글쎄'란 표정을 짓는다. 인연은 덩굴식물 같아 어느 땐 맹렬하게 뻗치다가 어느 대목부터는 시들해 버린다. 인연이 겨울 앞에 도착한 것이다.

우정에도 '유통기한'이 있을까? 경전보다 더 심오한 게 인간관계 같다. 그런데 자꾸 경전에서 인간을 발견하려 한다. 인간 속에서 캐낸 경전, 그게 '속담'이다. 속담을 넘어서는 경전은 곡학아세(曲學阿世) 아닌가. 그 힘은 혹세무민(惑世誣民)으로 번진다. 그들이 사문난적(斯文亂賊) 아닌가. 우리는 자기에게 한없이 우호적인 편견 때문에 일상을 견디고 살아갈 수 있다.

벤치에 흐르는 빗물. 수평으로 환원된 수직인가? 아무튼 지금 나는 62년 구력을 가진 밤벚꽃과 봄비를 친견 중이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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