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채한의 사람과 선(線)] 왕릉과 고분, 담담히 드리워진 곡선…천년쯤은 대수롭지 않은 듯 역사를 이어간다

  • 김채한 전 달성문화재단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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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7-09   |  발행일 2021-07-09 제38면   |  수정 2021-07-09 08:27
경주대릉원 23기 능과 총·고분
신라 문화·정치·사회 고스란히
고령군 지산동 고분군 700여 기
산등성이 4㎞에 걸쳐 '곡선 화음'
철의 나라 대가야 삶 녹아 있어
세계유산 등재 '조선왕릉' 40기
능·묘, 저마다 환경과 어우러져
신라 못지않은 장엄한 역사 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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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의 주인도 알 수 없고, 특징 또한 없는 무덤은 '분(墳)'이다. 한 군데 모여 있으면 고분군이다. 흔히 동네이름을 붙여 송산리 5호분 등으로 불린다. 세자와 세자비의 무덤과 왕의 친아버지와 친어머니의 무덤을 '원(園)'이라 칭한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의 무덤을 '묘(墓)'라 불린다. 사진은 신라 13대 미추왕릉.
현대 물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아인슈타인은 "물리보다 정치가 훨씬 어렵다"고 했다. 물리보다 어렵다는 정치를 선점하기 위해 우리 정치판은 지금 난리다. 진짜와 가짜 뉴스가 뒤범벅이 돼 홍수를 이룬다. 새로운 왕을 뽑기 위한 혈투도 시작됐다. 아무리 '정치란 승부를 가리는 것이 아니고 진실한 게임'이어야 한다지만 이미 불붙은 정치는 전쟁과 다름없다. 일찍이 장자도 '천하의 인심에 위반되는 것이면 왕도라 할 수 없다'고 했지만 소용없다. 왕도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무조건 이겨야 한다. 이기는 게 중요하다. 그러니 위험하다. 걱정이다.

왕을 뽑는 일 때문은 아니겠지만 최근 들어 왕릉에 대한 관심이 전에 없이 고조되고 있다.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우리나라에 있는 40기의 조선 왕릉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면서 왕릉답사 모임이나 세미나 및 다큐멘터리 제작 등도 왕성해졌다.

500년 이상을 이어온 조선왕조 역사의 숨결이 왕릉에는 고스란히 담겨 있다. 물론 그 이전의 선사시대의 무덤이나 고구려·백제·신라의 왕릉과 고려의 왕릉 또한 그 시대의 정치와 사회·문화까지 담고 있으며 숨겨진 우리 조상들의 생각과 삶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왕릉은 매우 가치가 높고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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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대릉원
◆경주의 왕릉들

왕릉이라면 우선 경주를 떠올린다. 웬만하면 경주 어느 지역에서도 곧장 왕릉과 마주할 수 있다. 도심의 한복판 평원처럼 펼쳐진 경주대릉원은 23기의 능과 총과 고분이 어울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그려내는 유연하기 그지없는 곡선들의 하모니가 마냥 신비롭기만 하다. 담담하고 대담하게 드리워진 저 곡선의 궤적들…. 그 아래에는 천년의 역사쯤이야 대수롭잖은 듯 오늘을 이어 간다. 천마총, 미추왕릉, 황남대총 등 신라의 왕족들이 대릉원을 이루며 어제와는 또 다른 역사 이야기를 매일매일 스스로 들춰가며 계속 들려 주는 듯하다.

어느 왕과 왕비인지가 뚜렷한 무덤을 '능(陵)'이라 한다. 그 무덤에서 왕족이 쓰던 유물들이 발견은 되었지만 무덤 주인이 확실하지 않으면 이를 '총(塚)'이라 부른다. 천마총이니 황남대총 등이 그렇다.

무덤의 주인도 알 수 없고, 특징 또한 없는 무덤은 '분(墳)'이다. 한 군데 모여 있으면 고분군이다. 흔히 동네 이름을 붙여 송산리 5호분 등으로 불린다. 세자와 세자비의 무덤과 왕의 친아버지와 친어머니의 무덤을 '원(園)'이라 칭한다. 사도세자 친어머니 영빈 이씨의 무덤이 '수경원'이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의 무덤을 '묘(墓)'라 불린다. 왕의 자식이라도 세자가 되지 못한 아들이나 공주나 옹주로 불린 딸들의 무덤 또한 묘로 불린다. 아무리 업적이 뛰어나도 마찬가지다. 김유신과 이순신의 묘가 좋은 예다. 상식선에서 한 번 적어 본 것이다.

경주대릉원 주변에는 엄청난 유적들이 많다. 첨성대, 계림, 반월성, 안압지, 최근 조성된 황리단길까지 겹쳐 산책로로는 최고다. 특히 황리단길에는 즐비한 맛집과 공예품 가게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저마다의 맛과 특성으로 멋을 부린다. 경주대릉원은 역사와 문화가 어울린 큰 마당 같다. 문화는 역사의 덩어리며 역사는 문화의 근원이라더니 과히 맞는 말이다. 역사가 있는 곳에 문화가 있고, 문화가 있는 곳에는 늘 역사가 함께했다.

◆유구한 무덤의 역사

솔직히 우리의 무덤 역사는 오래됐다. 1982년 충북 청원군의 한 동굴에서 4만여년 전인 구석기시대의 어린아이 화석이 발견됐다. 학계의 신선한 충격이 됐다. 이는 우리나라는 구석기시대에도 주검을 함부로 다루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흙과 돌을 이용해 묻혀 있던 화석이라 이미 그 당시에 매장풍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청동기를 지나면서 고인돌이 등장한다. 전 세계에 분포된 고인돌은 7만여 기. 우리나라에만 2만여 기가 있다. 북한 것과 합치면 3만여 기에 달한다. 이 중 1만9천여 기가 전남에 모여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고인돌 역시 전남 화순 대신리에 있다. 길이 7.3m, 폭 5m, 두께 4m, 덮개돌 무게만 280여 t. 2000년 유네스코는 전남 고창·화순, 강화도의 고인돌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특히 강화도의 탁자식 고인돌은 크기도 크지만 조형미가 뛰어나다. 너무 잘 생겨 늘 세계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경북 고령의 지산동 고분군. 도심과 경계를 지으며 산등성이 약 4㎞에 걸쳐 고분 700여 기가 가당찮은 곡선의 화음으로 매일 합창제를 벌인다. 이 길이 바로 '대가야 왕릉길'이다. 확인 안 된 고분까지 합치면 1만여 기에 이를 것이라는 게 일부 학계의 주장이다.

신라와는 다르게 대가야 고분들은 산 위에 마련됐으며 올라갈수록 봉분의 규모도 커진다. 이들 중 특히 관심을 끄는 고분은 44호 고분. 봉분 지름만 27m, 높이는 8m에 이른다. 1천500여 년 전 철의 나라 대가야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고분이다. 특히 역사학자들의 관심을 끈 순장제도의 실체가 이 무덤에서 확인됐다. 놀라움이었다. 지금 대가야박물관 전시실에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재연시켜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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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교동고분군
◆창녕의 고분군

'비화가야'라는 이름만 전해 오는 경남 창녕에도 엄청난 고분군이 있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170기 정도의 고분이 있었지만 지금은 30여 기에 불과하다. 소위 교동·송현동고분군이다. 일제에 의해 황폐화되고 그 후 도굴과 개간 등으로 훼손됐으며 24번 국도마저 교동과 송현동으로 고분군을 두 쪽으로 갈라놓았다. 원래의 모습을 되찾기가 정녕 불가능할까. 어떻게든 비화가야의 제 모습이 언젠가는 밝혀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장르를 가리지 않았던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역사는 언제든지 패자에 등을 돌리고, 승자를 옳다고 하는 것이란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창녕의 고분들은 마땅히 원형을 회복하는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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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불로동고분군
◆조선 왕릉들

뭐니 해도 우리의 왕릉은 '신들의 정원'이라 불리는 '조선왕릉'을 빼놓을 수 없다. 신라의 왕릉들이 자유분방하다면, 조선 왕릉들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오례의'에 근거를 둔 엄격한 절차를 중시했다. 왕릉은 입구격인 '금천교'부터 시작된다. 금천교는 능 앞으로 물이 잘 흘러갈 수 있도록 놓은 다리다. 이어 붉은 칠을 한 홍살문을 지나고 참도를 따라 정자각에 이어 비각·산신석·무인석·문인석을 지나 혼령이 앉아 노는 혼유석에 이르면 능이 바로 앞에 나타난다. 이런 절차를 치르는 신하와 민초의 곤경이 선하다.

조선 왕실에는 42기의 능과 13기의 원, 64기의 묘가 있다. 북한에 있는 제릉과 후릉을 제외하면 40기인 셈이다. 왕릉은 1966년 순정효황후를 유릉에 안치함으로써 561년간 진행된 장엄한 대장정의 역사를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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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한(전 달성문화재단대표이사)
이런 찬란한 이력을 놓치지 않으려 유네스코는 조선왕릉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한 것이다. 물론 그 능이나 묘들은 저마다 지닌 화려한 이야기부터 풍수지리 사상에 의해 주변 환경과 잘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공간을 만들기까지 숱한 내력들이 함께 묻혀 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벤자민 프랭클린은 인쇄 견습공에서 시작한 것을 평생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의 유서 첫머리를 '인쇄공 프랭클린은…'이라고 서두를 시작할 정도였다. 조선의 왕릉들이 보여준 방식과는 퍽 대조적이지만 어느 것이 맞고 틀리다는 견해는 있을 수 없다.

조선 왕릉은 조선의 전통과 문화가 고스란히 담긴 문화유산이다. 신라 왕릉 역시 신라의 역사와 문화가 숨 쉰다. 그리고 장대하고 위대하다.
글=김채한(전 달성문화재단 대표이사)
사진 제공=배원태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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