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향 영양 .3] 젖먹이 둘에 자신의 젖꼭지 물리다...'농사짓는 훈장' 청계 김진의 '눈물의 부성애'

  • 류혜숙 작가
  • |
  • 입력 2021-07-27   |  발행일 2021-07-27 제12면   |  수정 2021-08-23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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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군 영양읍 현리에 자리한 영산서원. 청계 김진이 1578년 세운 영산서당을 모태로 한 서원으로 영양 유일의 사액서원이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 오던 중 1871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훼철됐다가 2018년 6월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명상에 잠긴 듯한 얼굴에 눈매가 가늘다. 머리에는 테가 넓고 높은 전립을 썼으며 빛바랜 녹색 옷을 입고 가부좌하여 두 손을 소매 안에서 마주잡고 있다. 홀로 8남매를 키우며 다섯 아들 모두를 과거에 급제시킨 아버지, 청계(靑溪) 김진(金璡)의 73세 때의 초상이다. 청계는 16세기 중반 영양의 서쪽 청기(靑杞)로 들어왔다. 그는 관아에서 개간 허가를 받아 마을을 일구었고 영양 최초의 서당인 영산서당을 지어 후학 양성에도 나섰다. 오늘날 사람들은 청계를 일컬어 개척자, 교육자, 16세기 농촌 계몽 운동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청계는 자애롭고 엄한 아버지였고, 인(仁)과 의(義)의 정신을 대대로 세습하게 한 큰어른이었다.

16세기 중반 영양 청기로 들어와
관아에 개간 허가 받아 마을 일궈
사립교육기관인 '영산서당' 건립
서원 승격 후 퇴계·학봉 등 배향

홀로 8남매 키우며 교육에 매진
다섯아들 모두 과거에 급제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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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군 청기면 청기리에 있는 돈간재. 청계가 세상을 뜬 후 그의 증손 김시온이 청계가 휴게실로 쓰던 정자에 돈간재라는 현판을 달았다.

#1. 청계 김진

청계 김진은 연산군 6년인 1500년 2월 안동 천전리 반변천 앞 내앞마을에서 태어났다. 자는 영중(瑩中), 관향은 의성(義城)으로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석(金錫)을 시조로 한다. 이후 고려 문예부좌사윤 김태권(金台權)이 흥왕사에서 김용(金鏞)의 난에 순국하자 그의 아들 김거두(金居斗)가 화를 피해 안동으로 이거했다.

천전리 내앞에 처음 기틀을 잡은 이는 조부인 망계(望溪) 김만근(金望溪)이며 청계의 증조는 김한계(金漢溪)로 세조 즉위 후 평생 벼슬하지 않고 절의를 지킨 인물이다. 아버지는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낸 김예범(金禮範), 어머니는 영해신씨(寧海申氏)로 벽동군수(碧潼郡守)를 지낸 신명창(申命昌)의 딸이다.

청계는 집에서 글공부를 하다가 16세 때에 청송에 있던 고모할머니의 남편인 권간(權幹)에게서 수학했다. 권간은 학문과 덕행이 뛰어났고 특히 효자로 칭송받던 인물이었다. 청계는 훗날 자식들이 이름을 날릴 때마다 스승 권간의 가르침 덕분이라 했다.

청계는 청송의 이름난 가문인 여흥민씨(驪興閔氏) 민세경(閔世卿)의 딸과 결혼했다. 그리고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처숙 민세정(閔世貞)을 종유하며 학문과 견문을 더욱 넓혔다. 청계는 26세 때인 1525년에 사마시에 급제했다. 그는 성균관에서 공부하며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와 각별한 친교를 맺었고 각지에서 온 명사들과 사귀며 학업에 정진했다.

그러나 청계는 돌연 대과를 포기한다. 그리고 안동 임하(臨河)의 부암(傅巖)에 집을 짓고 살면서 서당을 한 칸 지어 자식들과 향리의 자제들을 가르쳤다. 그는 아침저녁으로 강 건너 부모님을 문안했는데 아무리 비바람이 몰아쳐도 폐하지 않았고 혹 다른 곳에 출타했을 때에는 반드시 부모님이 계신 곳에 먼저 들른 다음에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청계는 1540년에 아버지를 여의었고 1550년에 어머니를 잃었다. 그는 3년간 여묘살이를 하면서 한 번도 해이하지 않았고 제사를 지낼 때는 다른 사람들이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로 엄숙했다고 한다.

#2. 엄하고 자애로운 아버지

청계는 8남매를 두었는데 아들 5형제는 모두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문명(文名)을 떨쳤다. 맏아들 김극일(金克一)은 1546년 문과에 급제했으며 밀양부사(密陽府使)를 지냈다. 둘째 김수일(金守一)은 1555년 생원시에 급제하고 찰방(察訪)을 지냈다. 셋째 김명일(金明一)은 1564년에 생원시에 급제했고 효행으로 칭송받았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넷째는 학봉 김성일(金誠一)로 1568년 문과에 급제해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이 되었다. 다섯째 김복일(金復一)은 1570년 문과에 급제해 형조좌랑이 되었다.

청계의 장녀는 전주류씨 류성(柳城)에게 출가했는데 남편이 25세에 요절하자 3년 후 남편을 따라 단식해 자결하니 정려가 내려졌다. 청계는 고아가 된 외손자 형제를 키워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또한 청계는 일찍 홀로 돼 의지할 곳이 없는 처조카 명지재(明智齋) 민추(閔樞)를 거두어 자식들과 함께 가르치고 길렀다. 훗날 민추는 출세에 뜻을 두지 않고 후진을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았는데 당시 일대의 선비 중 그의 문하에서 배우지 않은 이가 없었다.

맏아들 극일이 문과에 급제했던 1546년에 정부인 여흥민씨가 세상을 떠났다. 이때 청계의 나이는 47세였다. 그는 새 아내를 맞이하지 않고 홀로 아이들을 키웠다. 넷째 아들 학봉 김성일이 쓴 청계 행장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큰형이 과거에 급제하고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 자녀가 8남매나 되었는데, 대부분 어린아이거나 강보에 싸여 있었다. 이에 아버지께서 온갖 고생을 다해 기르면서 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한밤중에 양쪽으로 어린아이를 끌어안고 있으면 아이가 어미젖을 찾았는데 그 소리가 아주 애처로웠다. 아버지께서 자신의 젖을 물려주었는데 비록 젖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아이는 젖꼭지를 빨면서 울음을 그쳤다. 아버지께서 이 일을 말씀하실 적마다 좌우에서 듣는 사람 중 울지 않은 이가 없었다.'

청계는 아무리 나이가 어린 자식이라 하더라도 항상 학당(學堂)에서 공부하게 했다. 때로는 가까이 마주 앉아 옛 사람들의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을 일일이 자세하고도 곡진하게 가르쳤다. 그리고 일찍이 '신하된 자는 차라리 옥처럼 부서질지언정 자신의 목숨이나 보전하려 해서는 안 된다. 너희들이 군자가 되어 죽는다면 나는 살아 있는 것처럼 여기겠으나, 소인 노릇을 하며 산다면 나는 죽은 것처럼 여길 것이다'라고 했다. 청계는 엄하면서도 자애로운 아버지였다.

#3. 영양에서의 삶…조핏골의 흥림초사

청계는 자녀들과 향리 자제들의 교육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후손들이 대대로 살 땅을 마련하기 위해 산간 오지 개간에 뛰어들었다. 그는 천전을 기반으로 임하, 신덕, 망천, 추월, 사빈, 송석, 선창, 낙연 등 반변천의 중상류와 멀리 강릉 금광평의 황무지를 개척했다.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버려진 땅을 개간해 후손들이 농사를 지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청계가 영양으로 들어온 것은 1557년경이라 여겨진다. 그는 청기의 동쪽 흥림산(興林山) 아래에 거처를 마련하고 흥림초사(興林草舍)라 이름 붙였다. 사람들은 그 땅을 천옥(天獄)이라 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하늘이 만든 감옥이었다. 마을 뒷산에 우거진 조피나무를 베어다 집을 지으니 사람들은 이 마을을 '조핏골'이라 불렀다. 그는 천옥의 땅을 농경지로 개척했다. 당시 청기 일대에서 개간을 통해 얻은 도지(임대료)가 300석이었다고 한다.

1570년경에는 낙후된 교육을 개탄하며 서당 건립을 주창했다. 그는 마을 주민들과 함께 매년 향회를 열어 곡식을 모으고 강령과 기강을 세웠다. 그리고 선조 11년인 1578년 마침내 영양 최초의 사립교육기관인 영산서당(英山書堂)을 세웠다. 1579년 청계의 팔순을 맞아 자녀들과 친척들이 청기에 모였는데, 대과에 오른 아들들과 사위가 영산서당의 향회에 참석했다고 한다.

영산서당은 1655년(효종 6년)에 서원으로 승격되면서 퇴계 이황과 학봉 김성일을 배향했으며, 1694년(숙종 20년)에는 '영산(英山)'이라고 사액됐다. 당시 경내 건물로는 묘우, 강당, 신문, 동재, 서재, 전사청, 주소 등이 있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 오던 중 1871년(고종 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됐다. 2018년 6월 영영군이 역사적 가치를 살리기 위해 전통양식으로 복원했다. 영산서원은 영양 유일의 사액서원으로 의미가 깊다.

청계는 말년에도 낚시와 밭갈이를 즐거워했고 기력이 강건해 활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명절 때면 시골의 벗들을 불러 모아 술을 마시며 농사짓는 법에 대해 이야기했고, 술이 몇 순배 돌면 활쏘기를 했다. 활을 단단하게 잡은 모습은 생기가 있었으며 동안(童顔)에 흰 머리카락이 신선과 같았는데 활을 쏘면 반드시 표적을 맞추었다고 한다. 그는 '팔십 먹은 늙은이가 과녁 맞춤 다투니, 북소리 둥둥 울려 마른 창자 동케 하네'라 했다.

청계는 81세인 1580년 윤4월에 흥림초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나이 여든이 넘었으니 천수를 누렸다. 하늘이 내게 내린 복이 이처럼 많으니 다시 무엇을 구하겠는가'하며 태연히 임종을 맞이했다고 한다. 그는 '재산은 300석 이상 갖지 말고, 벼슬은 당상관 이상 오르지 말 것'을 유훈으로 남겼다. 또한 제사를 위한 토지는 영원히 분배하지 못하도록 했고 제사 음식과 도구는 모두 검소하게 마련하라고 유언했다.

청계가 세상을 뜬 뒤 증손인 표은(瓢隱) 김시온(金是穩)이 청기로 들어왔다. 그는 증조부가 서당 휴게실로 쓰던 정자에 돈간재(敦艮齎)라는 현판을 달았다. 돈간재의 '돈'은 두텁다는 뜻과 노력한다는 뜻을 갖고 있으며, '간'은 은둔하다는 뜻과 어떤 어려움이라도 이겨낸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돈간재는 삶의 어려움을 묵묵히 견디며 자연과 더불어, 자연을 벗 삼아 청빈하게 살아가는 선비의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본채 마루에 '흥림초사' 현판이 걸려 있다. 주사(廚舍) 대문에 '인(仁)을 머리에 이고, 의(義)를 가슴에 품다'라는 글이 붙어 있다. 부엌문에도 '인'과 '의' 두 글자가 붙어 있다.

청계의 후손들 중 문과 급제자는 24명, 생원 진사는 64명, 문집과 유고를 남긴 이는 239명, 독립운동으로 건국훈장을 받은 이는 58명에 이른다. 청계가 강조했던 군자로서의 삶은 자손들의 역사적 삶을 규정하는 규범이 되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영양군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누리집. 한국국학진흥원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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