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18) 김현규] "연극인에겐 정년 없다" 암투병 속 50년간 200여편 출연...대구연극 주춧돌

  • 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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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9-06 08:31  |  수정 2021-09-06 10:53  |  발행일 2021-09-06 제20면
후배 연극인들이 두세 달 공들여 만든 작품도 대관료 탓, 서너 차례만 무대 서는 현실에 안타까움
"배우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 만들어 보자" 대명공연문화거리 시초 '우전 소극장' 탄생 밑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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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50여 년간 수 백편 넘는 작품에 출연하며 평생을 '현역 배우'로 살고자 꿈꿨던 배우가 있다. 1964년 연극계에 입문한 우전(友田) 김현규(金鉉圭, 1945~2017) 선생이 그 주인공이다. '원술랑' '오셀로' '혈맥' '맹진사댁 경사' '안티고네' '신태평천하' '늘근 도둑 이야기' '만화방 미숙이' 등 어림잡아 200여 편의 연극에 출연했다. 특히 김현규는 2004년 대구 대명공연문화거리의 시초가 된 '우전 소극장'의 문을 열어 대구 연극의 저변을 넓히는데 공헌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병마에 시달리던 말년에도 여러 작품에 출연하며 연기 의욕을 불태웠으며, 후배 연극인들에게 '열심히 노력하는 배우'이자 '애정 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은 선배'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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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연기연습 중인 김현규 선생의 모습. (김현규 선생 장녀 김은실씨 제공)
◆연극에 대한 열정을 품다

김현규는 1945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났다. 경주에 살던 김현규의 부친이 터전을 옮기면서 대구에 정착했다. 삼덕초등, 대건중·고를 졸업했으며 청구대(영남대의 전신) 상과를 중퇴했다. 고교와 대학 재학 당시 농구부 선수였으며, 음악다방 DJ로도 활동하는 등 다방면에 재능을 보였다. 김현규가 연극에 입문할 시기인 1960년대 지역 연극인들의 활동 여건은 녹록지 않았다. 소수 극단들이 펼치는 몇 안 되는 공연으로는 생계를 꾸려가기에도 벅찼기 때문이다. 당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대구 연극인들은 기성극단을 만드는 등 연극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았다.

김현규 역시 1960년대 여러 작품에 출연하는 등 배우로서의 삶을 이어갔고 당대 배우들과의 교분도 두터웠다. 대구 연극계 인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대구 YMCA는 지역 극단에 연습장을 제공하는 등 여러 지원을 하고 있었다. 김현규와 함께 활동했던 지역 연극계 원로 배우 채치민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김현규는 YMCA에서 잠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같은 건물에서 연극 제작에 몰두하던 아성(雅聲) 이필동(1944~2008) 선생과 자연스레 친분을 쌓게 됐고, 이러한 인연을 계기로 이필동과 함께 작품활동을 이어가기도 했다"며 옛 기억을 떠올렸다.

연극인으로서 탄탄대로가 펼쳐질 것만 같았지만 이후 김현규의 삶은 힘들었다. 경제적 이유로 연극과 떨어져 지낸 세월이 적지 않았다. 연극에 대한 열정만으로는 가장의 역할을 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지만 결코 연극과의 끈을 놓치지는 않았다. 간간이 작품에 출연하며 연극과의 인연을 이어간 끝에 1990년대부터는 연극에만 몰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원로 배우 채치민은 "김현규 선생이 한때 사업을 한 적 있다. 그때만 해도 연극만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현규 선생은 자신의 사무실을 후배 연극인들에게 연습장으로 내주는 등 연극에 대한 그의 열정만은 여전 했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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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규(왼쪽)선생이 출연한 '늘근 도둑 이야기'의 한 장면.(극단 처용 제공)
◆대명공연문화거리 탄생 디딤돌

꿈에 그리던 연극무대에 본격 복귀한 김현규였지만 당시 지역 연극계의 현실은 아쉬운 점이 많았다. 대구지역의 소극장 무대가 부족해 좋은 작품일지라도 관객에게 선보일 수 없는 악순환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지금은 대구지역 구마다 공연을 위한 문화공간들이 마련돼 있지만, 당시만 해도 공연을 선보일 극장은 태부족이었다. 이에 김현규는 2004년 대구 남구 대명동에 그의 호 '우전'을 따 명명한 '우전 소극장'을 세우기에 이른다. '우전 소극장'의 탄생 배경에는 모금 운동 등에 동참한 지역 예술인들의 도움도 한몫했다. 당시 김현규는 "배우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보자"며 소극장 건립에 열정을 쏟아부었다. "연극인에게는 정년이 없다"며 연극에 남다른 애정을 품었던 그의 철학도 '우전 소극장' 탄생의 밑거름이 됐다.

김현규는 영남일보와의 '우전 소극장' 개관 인터뷰에서 "무대에 후배와 같이 서면서 가장 안타까운 점은 후배들이 두세 달 공들여 만든 작품을 서너 차례 무대에 올리고 끝낸다는 것입니다. 작품 하나를 만들기 위해 쏟아부은 노력에 비하면 너무 허망한 일이지요. 후배들이 장기 공연을 못 하는 것은 결국 극장 대관 등의 재정 문제 때문인데, 대관료를 최소화해 며칠의 공연 비용으로 보름, 한 달씩 공연하도록 해주자는 것이 이 극장의 설립 목표입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우전 소극장' 설립 후 대구지역 연극계에는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우전 소극장' 주변으로 극장이 하나 둘 생기면서 배우들의 활동 근거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과거 인기 있는 작품일지라도 공간 부족 탓에 1회 공연에 그치는 경우가 다반사였지만, 대명동 일원에 소극장이 속속 들어서면서 흥행작품의 정기 공연이 가능해졌다. 이로 인해 각 극단의 공연이 활성화되고, 배우들도 늘어나는 등 대구 연극계에 긍정적 변화가 감지됐다. 이후 연극 관련 인프라들이 대명동에 밀집했고, 현재 10여 곳의 극단이 대명공연문화거리를 중심으로 활동 중이다. 또한 대명공연문화거리의 활성화는 인근 대학의 캠퍼스 이전이라는 시대상의 변화와 맞물려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우전 소극장'이 대명동에 들어선 것을 계기로 학생들을 위한 공간이 연극인과 관객을 위한 공간으로 변화한 것이다. 2010년 3월 대구 남구청은 대명동 소극장 밀집지 일대를 대명공연문화거리로 선포했다. 김현규 선생과 함께 '우전 소극장' 설립에 나섰던 '극단 처용'의 성석배 대표는 "'우전 소극장' 이후 지역 연극계 구성원 수가 비약적으로 늘었다. 이는 2000년 이전과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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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연극계의 산증인인 배우 김현규의 고희기념공연 '한번만 더 사랑할 수 있다면' 연습 장면. (영남일보 DB)
◆노력하는 연극인의 표상

김현규에게 연극은 평생의 과업이자 자부심의 원천이었다. 김현규는 평소 연극인들 사이에서 옷 잘 입는 '멋쟁이 배우'로 통했다. 그는 생전 "연극과 연극인에 대한 격을 높이기 위해 함부로 옷을 입지 않는다"며 예술인으로서 자존감을 감추지 않았다. 작품 연습에 들어갈 때마다 손수 대본 표지를 만들고 붓글씨로 직접 제목을 쓰는 등 연극과 관련한 모든 일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가난'이 연극인의 숙명으로 여겨지던 시기, 자녀들을 키울 때도 김현규는 예술인다운 면모를 잃지 않았다. 김현규 선생의 장녀 김은실씨는 "아버지는 연극과 직장생활을 같이 하셨지만, 음악·미술·스포츠 등에 능한 팔방미인이었다. 우리에게 예술과 문화 전반에 걸쳐 풍요로운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해 주셨다"고 말했다.

왕성한 활동 중 위암 선고를 받았을 때도 연극에 대한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수술 직전까지도 '만화방 미숙이' 공연에 나섰을 정도였다. 건강 악화로 몸져누웠을 때도 대본을 읊조리며 버텼다. 암을 이겨낸 '지역 최고령 현역 배우'라는 찬사를 들었지만, 김현규는 2015년 자신의 칠순 기념 공연 '한 번만 더 사랑할 수 있다면'을 마지막으로 끝내 무대 위에 서지 못했다. 당시 지역 연극인들은 김현규를 두고 '대구연극의 주춧돌' '대구연극의 산증인'이라며 그의 마지막 무대를 축하했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공동기획 : 대구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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