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눈으로 보는 G2] 미국식 당근과 채찍

  • 변영학 대구가톨릭대 정치외교학과/군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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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9-20 16:30  |  수정 2021-11-02 08:58
미국 유학시절 필자가 본 가장 강렬한 이미지는 2001년 9월11일 학생식당에서 점심으로 햄버거를 먹다가 본 CNN 영상이었다. 민항기가 잇따라 세계무역센터 빌딩을 강타한, 이른바 '9·11 테러' 사건이다. 당시 식당 안 미국인들은 마치 정지화면처럼 얼어붙어 미동도 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20년이 흘렀다. 최근 바이든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정계 거물들은 테러현장인 ‘그라운드 제로’에 모여 희생자를 추모하는 행사를 가졌다. 딸을 잃어버린 한 유족 대표는 개회사에서 당시를 회고하며 “사악한 악령이 세상에 내려 앉은 것처럼 느껴진 끔찍한 그날”이라고 말했다. 그 사건으로 미국인에게 분노와 보복의 감정이 일어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서 있는 자리가 다르면 풍경도 바뀐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열강의 개입과 폭력에 분노하고 있던 일부 중동 이슬람인은 미국이 9·11사건을 자초한 것으로 생각했다. 원래 테러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강자에 대한 약자의 절망이 폭력으로 변해 표출되는 것이다. 강자의 오만과 약자의 절망은 모두 폭력으로 만나기 마련이다. 현실의 국제정치는 비정하다.

현실정치에서 권력자는 채찍과 당근을 활용해 지배한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군사력이라는 채찍으로 세계를 관리한다. 약 20만명의 미군이 177개 국가에서 약 800개의 크고 작은 군사기지와 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강고한 군사제국도 종종 특정 지역에선 실패한다. 베트남과 아프가니스탄에서 그랬다. 체계적인 군사적 헤게모니로 옹벽을 세워도 현지 무장세력은 종종 그 벽에 구멍을 낸다.

9·11사건은 미국이 전쟁국가로 거듭나는 계기가 됐고 그 비용은 막대했다. 2001년 이후 미 국방부는 해외비상작전에 2조1천10억 달러, 미국 본토 내 대테러 작전으로 1조1천170억 달러, 해외 미군기지 예산 증액이 8천840억 달러로 총 5조8천억 달러를 썼다. 향후 30년 동안 참전용사 치료비용이 2조2천억 달러인 것을 감안하면 8조 달러(한화 약 9천600조 원)에 달한다. 한국정부 예산 총수입의 2배다.

아프간 20년 전쟁에 참전하고도 최근 허둥지둥 철군하면서 미국은 자존심을 구겼다. 그러나 국내 여론의 악화를 무릅쓰고 3명의 전임 대통령이 주저했던 철군을 단행한 바이든 대통령의 선택은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다. 그는 '제국의 무덤'이라 불리는 아프간에 더 이상 발목 잡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기후 변화와 중국 견제라는 자신만의 새로운 의제를 추진하고 싶었다.

미국은 글로벌 헤게모니를 위해 군사적 강제력과 함께 해외원조를 일종의 당근으로 애용한다. 가령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해 마샬플랜으로 유럽 재건을 도왔고, 1949년 중국 공산화 이후엔 동북아와 동남아에 엄청난 물자를 원조했다. 쿠바혁명 이후에도 남미지역에 대한 대규모 원조가 시작됐다. 그런데 미국의 원조는 얼마나 효과적일까.

미국의 원조정책은 부처 간 협의형이다. 영국·캐나다·호주처럼 하나의 독립기관이 책임 운영하지 않는다. 국제개발청·국방부·재무부·농림부 등 여러 부처가 원조 프로그램의 각 부분을 맡아 운영한다. 이런 방식은 각 부처의 노하우를 해외원조에 적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부처 간 조정비용이 크고 일관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싱크탱크인 글로벌개발센터(Center for Global Development)에 따르면 미국 해외원조의 질은 2021년 전체 49개 국가와 원조기구 중에서 35위로 하위권이다.

미국의 원조정책은 자신의 관점에서 화석화돼 현지인을 배려하는 섬세함이 부족하다. 케냐의 기근을 돕기 위해 미국이 옥수수를 원조하면 현지에선 원조물자를 둘러싼 부패가 기승을 부리고 농산물 가격이 폭락해 현지 농민이 오히려 고통 받는다. 말라리아를 퇴치하기 위해 모기장을 배포하면 현지인은 물고기를 잡는 그물로 쓴다. 정치적 동맹 관계에 있는 현지 독재자를 지원하기 위해 이들의 선거유세 기간에 더 많은 원조물자를 퍼붓기도 한다.

이처럼 미국의 군사적 지배에 구멍이 숭숭 나고 해외원조가 수원국의 사회경제적 발전에 비효과적이라 하더라도 미국의 지배가 그럭저럭 유지되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한국은 OECD 클럽 회원이다. 글로벌 시장에서 수익을 올리는 수출강국이므로 그만큼 국제사회에 대한 기여와 책임도 커진다. 하지만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한도 내에서 움직여야 한다. 분쟁국에 대한 군사적 개입이나 참전은 신중해야 하며, 가급적 비전투 인력(의료·건설 등) 위주로 한정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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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글로벌개발센터 보고서를 보면, 한국의 해외원조 질은 전체 49개 국가와 원조기구 중에서 18위로 중위권이다. 원조 투명성 지수의 경우, 특히 외교부 산하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2018년 37점에서 2020년 70.7점으로 크게 향상됐다.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변영학<대구가톨릭대 정치외교학과/군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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