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영남 출신 '레전드 제주목사' 4명…조정에 바치는 공물 80% 경감, 지금도 존경받는 '탐라의 영웅'

  • 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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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10-22   |  발행일 2021-10-22 제35면   |  수정 2021-10-22 08:44
탐라순력도
조선 오백년 동안 제주목사를 역임한 이는 286명이다. 제주도는 대역죄인의 단골 유배지였고 바람으로 오가는 뱃길은 사고가 잦았으며 섬 특유의 무속과 토속신앙이 만연했다. 1703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병와 이형상이 제주도를 순력한 뒤 화공 김남길에게 그리게 한 탐라순력도. 1700년대 초반 제주 사회의 생생한 모습을 담고 있어 보물 652호로 지정됐다. <국립제주박물관 제공>
조선 오백년 동안 제주목사를 역임한 이는 286명이다. 제주도는 대역죄인의 단골 유배지였고 바람으로 오가는 뱃길은 사고가 잦았으며 섬 특유의 무속과 토속신앙이 만연했다. 그 어려움 속에서 섬사람을 교화하고 진휼과 학문으로 선정을 베풀어 오늘날까지 치적이 전설처럼 전해오는 네 사람의 영남 인물이 있다. 성종조 김천의 노촌 이약동, 숙종조 영천의 병와 이형상, 영조조 봉화의 노봉 김정, 헌종조 성주의 응와 이원조가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올곧은 영남선비로 제주목사 시절 선정을 베풀어 향리인 경상도보다 제주도에서 더 많이 알려져 있고 연구도 활발하며 오늘날 여전히 존경을 받고 있다. 목민 선정이 시공을 뛰어넘었다고나 할까. 영남 선비의 참됨을 탐라에 펼친 이들이 행적을 더듬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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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촌 이약동은 김천 양천동 하로마을 출신으로 1470년 성종 1년에 55세 나이로 제주목사에 부임했다. 하로서원. <김천시 제공>
1470년(성종1년) 노촌 이약동
한라산 산신제 때 백성들 얼어죽자
눈보라 막는 산천단 만들어 제 올려

◆청백리의 상징 노촌 이약동

벽진이씨 노촌 이약동(1416∼1493)은 김천 양천동 하로마을 출신으로 1470년 성종 1년에 55세 나이로 제주목사에 부임했다. 당시 제주도에는 관청 주도로 국태민안을 비는 한라산 산신제를 백록담에서 봉행했는데 그때마다 적설과 한풍으로 얼어 죽는 사람이 많았다. 노촌은 한라산 기슭 소산오름 곰솔밭에 산천단을 만들어 산신제를 지내도록 했고 그 이후로 동사하는 백성이 없어 칭송이 자자했다. 또한 조정 공물을 감해 백성 부담을 줄이는 선정이 왕조실록에 남아있는데 성종은 공물로 인한 제주 백성의 고충이 적지 않다며 노촌의 장계대로 노루 가죽은 50장에서 10장으로 줄여 공납하고 진주는 얻는 대로 올리라고 했다.

노촌이 임기를 마치고 제주도를 떠날 때 재임 중 사용한 기물은 모두 관아에 두었고 손에 든 말채찍조차 '관물'이라는 이유로 읍성 문루에 걸어 두었다. 이 일은 후임 목사들에게 아름다운 경계가 되었으며, 세월이 흘러 채찍이 없어진 후에는 백성들이 바위에 채찍 모양을 새겨 이를 기렸는데 그 바위가 '괘편암(掛鞭岩)'이다. 그리고 한양으로 귀임할 때 배가 갑작스러운 풍랑으로 뒤집힐 위험에 처했는데 노촌은 "나의 행장에 떳떳지 못한 물건은 하나도 없는데 누가 나를 속이고 욕되게 하여 하늘이 나에게 벌을 내리려 하는 것이 아닌가" 하며 제주 군교들이 전별 선물로 몰래 실은 갑옷을 찾아내 바다에 던졌다. 이것이 유명한 '투갑연고사(投甲淵故事)'로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자세히 실려 있다.

훗날 대사간에 올랐을 때 서거정은 태평성대에 당당하게 언로가 열리니 간관 자리에 다시 어진 이를 얻었다고 그를 칭찬했고 중종 때 청백리로 선정됐다. 육당 최남선은 조선 오백년 대표인물 100인을 선정하면서 청렴 분야에서 노촌을 꼽았다. 제주도민은 한라산 곰솔공원에 산신제단 복원 이약동 기적비(紀蹟碑)를 세웠고 '진실로 제주도를 사랑한 최초의 육지인'이라 칭했다. 경북도는 경북의 역사 인물로 선정했고 김천시는 이약동 청백리상을 제정하여 청렴한 공무원을 표창하고 있다. 그가 남긴 시다. '내살림 가난하여 나눠 줄 것이 없고/ 오직 있는 것은 낡은 표주박과 질그릇뿐/ 주옥이 상자에 가득해도 곧 없어질 수 있으니/ 후손에게 청백하기를 당부하는 것만 못 하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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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와 이형상은 영천 성내동 금호강변에 호연정을 짓고 30여 년간 후학 양성과 142종 326책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영천시 제공>
1703년(숙종29년) 병와 이형상
무속행위·근친혼·일부다처제 금지
18C 제주 풍경 도첩으로 남기기도

◆무속에 철퇴를 내린 병와 이형상

1700년 제주도는 원시신앙이 강해 천신·지신·산신·해신·풍신이 자연현상을 일으킨다고 믿어 무속이 백성을 지배하고 있었다. 1703년 숙종 29년에 제주목사로 부임한 병와 이형상(1653∼1733)은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속신앙을 없애는 일이었다. 섬 곳곳의 신당 129개소와 모든 무구들을 불태워버리고 1천명의 무당을 모두 농사에 종사 시켜 무속행위를 엄금했다. 다산의 목민심서에도 병와가 광양당이란 신당을 불태운 이야기가 나온다.

아울러 아직 남아있는 일부다처제와 근친혼을 금지시켰고 물이 귀해 남녀가 샘가에서 함께 목욕하거나 해산물을 채취할 때 해녀가 벌거벗고 자맥질하거나 부녀자들이 개천가에서 목욕하는 모습은 유교 이념과 미풍양속에 어긋난다 하여 금지시켰고 토호의 권력 남용도 과감하게 제거했다. 제주도 특산물인 말 사육에 특정 가문이 대대로 산마감독관을 세습해 권세를 부리고 관리를 괴롭히고 있어 이를 혁파하고 능력이 있는 자로 교체했다. 아울러 세 고을의 향교를 수리하고 향교 교수를 학덕 있는 인물로 임명해 낙후됐던 제주 유학에 새바람을 불어넣었다. 백성들은 4개 송덕비를 세워 그의 공덕을 칭송했는데 제주시 삼성혈에 남아 있다.

병와의 제주 토속신 혁파가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그 후 제주도에서는 '영천 이목사' 이름의 설화와 구비전승 이야기가 널리 퍼졌다. 신당이 불타 화가 난 귀신들이 영천 이 목사를 괴롭히고 싸우는 이야기로 제주민담이 됐다.

병와는 제주목사 1년 만에 파직됐는데 숙종조 극심했던 당쟁의 산물이다. 그가 제주목사로 부임하기 수년 전에 이조판서를 지낸 기호 남인 오시복이 무고의 옥에 연루돼 대정현에 유배와 있었고 병와가 순력하면서 오시복을 만났다. 훗날 노론 4대신이 된 이건명이 이를 빌미로 병와를 탄핵하자 파직되어 영천으로 돌아왔다. 오시복은 16년 귀양살이로 영해 배소에서 세상을 떠났고 병와도 노론 정국에 일체의 관직을 사양하고 초야에 묻힌다.

병와는 영천 성내동 금호강변에 호연정을 짓고 30여 년간 후학 양성과 142종 326책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의 학문은 매우 넓고 깊어 1956년 발견된 병와가곡집에는 172명의 한글 시조 1천109점이 실려 있고 고전문학의 주요 자료로 고교 국어영역에 단골로 나온다. 그의 10종 15책은 보물 문화재로 지정됐고 그중 탐라순력도는 제주도를 순력한 뒤 제주 자연, 역사, 산물의 모습을 그린 28폭 도첩으로 1974년 처음 공개됐다.

18세기 탐라의 아름다운 모습이 담긴 귀중한 보물로 국립제주박물관에서 매입했다. 남환박물지는 제주도 인문 지리서로 지리, 역사, 물산, 자연생태, 봉수, 풍습 등을 백과사전식으로 생생하게 기록한 박물지다. 최근에 국역되어 책으로 발간됐다. 참고로 '남환'이란 '남쪽의 벼슬아치'란 뜻이다.

9개 고을의 수령을 지냈지만 변변찮은 집 하나 마련하지 않았고 제주도를 떠날 때 거문고와 책 몇 권이 전부여서 정조 때 청백리로 선정됐다.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 10세손으로 조선왕가 후손이 영남에 뿌리를 내린 유일한 집안인 듯하다. 대대로 간직해 온 병와의 수많은 유물은 호연정 뒤편의 유고각에 보관하고 있는데 아담하게 병와박물관을 지었으면 좋겠다.

노봉정사
노봉 김정이 자신의 증조부 김응조를 기리기 위해 봉화 물야 오록마을에 지은 노봉정사.
1735년(영조11년) 노봉 김정
'제주목의 관문' 화북포 방파제 공사
임기 후 육지가는 배 기다리다 순직


◆제주에서 순직한 노봉 김정

노봉 김정(1670~1737)은 안동의 명문가 풍산김씨 출신이다. 팔연오계(八蓮五桂)로 유명한 풍산김씨 8형제 중 여섯째 학사 김응조의 증손으로 영조 때 제주목사로 부임했다. 66세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진휼과 흥학(興學)에 힘쓰고 청렴한 품성으로 치적을 쌓아 향리인 영남보다 제주에서 더 존경받고 제주 역사와 함께 제주도민 기억 속에 남아있는 인물이다.

제주목사 시절 가장 큰 치적은 화북 방죽(방파제) 공사다. 화북포는 제주목의 관문으로 제주를 오가는 배들이 왕래하며 정박하는 곳인데 포구가 얕고 비좁아 풍랑이 치면 항 내에서 파선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노봉은 창미 3백 섬을 내어 세 읍의 일꾼 만명을 모아 방죽을 축조하면서 스스로 돌덩이를 지고 나르며 공사를 독려하니 백성들이 감읍하며 무사히 공사를 마쳤고 방죽은 단단하고 완전하여 오랫동안 안전한 뱃길이 됐다. 그가 쓴 고유문(告由文)에는 층층이 굳게 쌓아 백세를 지탱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애민정신이 가득하다.

사비를 털어 삼천서당을 지어 제주 백성들에게 유학의 기본을 가르쳤고 어선을 축조하고 어로기술을 향상시켰으며 제주 생산물을 육지의 쌀과 교환하여 대동미로 비축했고 흉년에 구휼하여 굶어 죽는 이가 없도록 했다.

2년6개월의 제주목사 임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가기 위해 화북포구 후풍관에 머물다가 68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제주 백성을 위해 진력을 다한 화북포 방죽에서 순직했다. 부고를 전해 들은 영조는 안타까워하면서 삼남의 방백(方伯·관찰사 별칭)으로 하여금 향리인 봉화 물야의 오록마을까지 상행(喪行)을 호송케 했고 제주 유생들이 남해를 건너 영호남 2천리를 운구했다.

제주 백성들이 그의 치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노봉 김정 선생 흥학비와 공덕비가 오현단 유적지에 남아 있고 김만덕기념관 생태원 외벽에는 벽화로 치적을 새겨 놓았다. 제주도민들은 조선 오백년 동안 제주를 거쳐 간 수많은 목민관 가운데 노봉을 역대 최고 선정관(善政官) 중 한 분이라고 말 하는데 주저하지 않고 있다.

1841년(헌종7년) 응와 이원조
태풍 발생하자 호남米 조달해 구휼
우도 개간…사람 살 수 있는 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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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
◆추사와 논변을 펼친 응와 이원조

성주 월항 한개마을 출신 응와 이원조(1792~1871)는 1841년 헌종 때 50세 나이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여 많은 치적을 남겼다. 태풍으로 기민이 발생하자 호남 창미를 조달하여 구휼하였고 우도와 가파도에 있는 우마 방목장을 제주도로 옮겨 관리에 용이토록 하고 무인도인 우도를 개간하기 위하여 조정의 승인을 받아 사람이 살도록 했다. 오늘날 제주 경승지가 된 우도는 응와의 목사 시절에 개발이 시작됐다.

귤림서원과 삼천서당을 중수하고 유생들의 학업을 엄격하게 지도했으며 백성들에게 유교의 권선징악을 가르쳤다. 그가 쓴 탐라록과 탐라지초본은 19세기 제주도의 귀중한 자료다. 동계 정온 적거 유허비를 세우고 추사 김정희와 논변을 펼친 이야기는 지난 연재물 '성주가 낳은 인물들(영남일보 8월13일자 W3면 보도)'에 언급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여행작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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