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눈으로 보는 G2] 억만장자세

  • 변영학
  • |
  • 입력 2021-11-02 13:54  |  수정 2021-11-02 15:54

최근 미국 상원 금융위원회 위원장인 론 와이든이 '억만장자세(Billionaires Tax)'를 제안했다. 과세 대상은 10억 달러(약 1조2천억 원) 이상 자산 보유자 또는 3년 연속 1억 달러(약 1천2백억 원) 이상 소득을 올린 자들이다. 미국 내 약 700명 정도의 슈퍼 리치들이 해당된다.

이 놀라운 제안은 팬데믹의 사회적 비용을 공정히 분담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나왔다. 코로나가 미국을 덮친 기간 슈퍼 리치는 주식과 자산 가격의 상승으로 약 2조 달러(약 2천4백조 원)의 순이익을 벌었다. 이에 팬데믹으로 손해를 본 시민에겐 합당한 보상과 지원을, 이득을 본 시민은 세금으로 공동체에 기여하라는 논리다.

억만장자세 제안은 미국 세금정책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현행법상 주식 가격이 아무리 오르더라도 과세 대상이 아니다. 그 주식을 팔아 돈을 손에 쥘 때에만 과세된다. 실현되지 않는 소득에 대해선 과세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반영된 것이다.

아마존의 최고경영자 제프 베이조스의 기본급은 약 8만 달러다. 이는 미국 상시 고용 노동자의 평균인 약 3만8천 달러보다 두 배 조금 넘는 수준이다. 반면 베이조스는 아마존 주식의 10.6%를 갖고 있다. 아마존 주가는 지난 팬데믹 1년 동안 무려 46.7% 상승했다. 베이조스의 주식 재산은 1천992억 달러(약 234조9천억 원)로 평가된다.

베이조스가 주식을 팔지 않았기 때문에 최근 5년간 그에게 부과된 실질 소득세율은 고작 0.98%였다. 미국 중위소득 가정의 실질 소득세율이 평균 14%인 것과 비교하면 매우 낮다. 억만장자세가 통과되면 주식 보유자가 주식을 팔지 않더라도 매년 보유 주식 가치를 평가해 가격 증가분에 대해 20%의 높은 세율로 과세하게 된다.

‘실현되지 않은’ 재산에 대해 세금을 부과할지 미국 민주당이 선택의 기로에 선 것은 극심한 불평등 때문이다. 2020년 상위 1%의 소득이 국민 총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8.8%이지만, 이들의 재산은 국부(國富)의 34.9%를 차지한다. 소득에 맞추어진 세금정책을 재산과 자산까지 확대하려는 담대한 시도에는 이 같은 배경이 깔려 있다.

억만장자세는 조세 저항을 고려한 민주당의 전략이기도 하다. 억만장자세는 미국 내 슈퍼 리치 약 700명을 겨냥한 것이지 ‘일반적’ 부유층과 중산층은 대상이 아니다. 더 많은 재원 마련을 위해 상위 중산층까지 대상을 확대했다가는 조세 저항에 부닥쳐 실패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슈퍼 리치와 중산층을 분리하려는 민주당의 꾀를 간파한 것은 테슬라의 최고경영자 일론 머스크다. 그는 트위터에 “이런 과세는 곧 너희들에게도 확대될 것”이라고 선동(?)하면서 중산층을 규합하고 나섰다.

민주당의 이런 노력이 실현될 수 있을지는 좀더 지켜봐야 한다. 처음에 바이든 행정부나 민주당 지도부는 ‘인적 인프라’로 불리는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실행하기 위해 법인세율 인상을 추진했다. 그러나 보수적 성향의 공화당 의원과 일부 중도파 민주당 의원의 반대에 부닥치자 법인세 인상을 포기하고 다른 재원을 찾아 나선 것이 바로 억만장자세다. 즉 예산 확보를 위한 복잡한 의회 정치의 딜레마 속에 불쑥 튀어나온 안이었다. 이는 앞으로 의회 내 갈등과 타협 속에서 억만장자세가 얼마든지 폐기 혹은 완화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진국 최악의 불평등 구조를 가진 미국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억만장자세 논쟁은 '건강하다' 하겠다. 사실 자본주의적 사회경제는 근본적으로 불평등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를 교정하는 것은 역시 국가와 정치의 영역이다. 그거 하라고 나라가 있는 것이다.

한국의 불평등은 선진국 클럽에서 심한 축에 든다. OECD 공식 지니계수 통계를 보면 한국은 2018년에 0.345를 나타냈다. 북유럽 국가는 0.25~0.29 수준으로 평등한 편에 속한다. 영국과 미국은 선진국에서 가장 불평등한 0.36과 0.39다. 지니계수가 0.25를 넘으면 경제성장을 갉아 먹는다. 경제성장을 하고 난 후에 복지정책과 불평등 완화를 강구하겠다는 것은 선후가 뒤바뀐 착오다. 불평등을 줄이면 경제성장이 더 잘된다.
 

변영학교수.jpg
변영학 교수

답답한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불평등 문제가 선거 의제로 부상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선거와 후보 경쟁은 뜨겁고 시끄러우나 속은 텅 비어 있다. 불평등은 재난지원금의 선별 혹은 보편적 지급 논의에 갇혀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다. 대장동 의혹과 검찰의 고발사주 의혹만이 대선 정국을 가득 채운다. 이러한 개발 특혜 논란과 부정부패 이슈는 결국 법치주의와 개발 규제법의 강화로써 그 해결책을 찾을 것이다. 그러나 법치와 규제가 보통 사람들의 평균적 삶을 개선할 수는 없다.

 

변영학<대구가톨릭대 정치외교학과/군사학과 교수, 미국 텍사스주립대(오스틴) 정치학 박사>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경제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