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22) 박상근] 최무룡 등 피란 연극인이 남긴 리얼리즘 이어받아 '대구연극 1세대' 초석 다져

  • 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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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11-15   |  발행일 2021-11-15 제20면   |  수정 2021-11-15 11:47
해체된 지역극단 합동공연·시립극단 창단에 힘써…교사 퇴임후 평생 소원이던 배우의 길은 끝내 못이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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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 년 동안 지역 연극 발전을 위해 헌신한 박상근(1941~2001) 선생은 배우와 연극행정가, 교사의 삶을 살며 연극에 평생을 바친 인물이다. 


박상근은 특히 1950년대 6·25전쟁 이후 대구에 뿌리내린 '정통 리얼리즘(사실주의) 연극'의 정신을 이어받아 지역 연극 발전의 원동력을 제공했다. 

또한 대구경북연극협회장을 거쳐 대구시립극단 창단 준비위원회의 주역으로 활동하며 1998년 대구시립극단 창단에도 기여했다. 

배우로서는 '지평선 너머' '유리 동물원' '오델로' 등의 작품에 출연하고 '시집가는 날' 등을 연출하는 등 150여 편의 작품에서 배우와 연출로 참여했다. 1999년 교직 퇴임 후 배우의 길만 오롯이 걸으려 했지만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한 채 2001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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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에 출연 중인 박상근의 모습. <박상근 선생 딸 박세희씨 제공>

◆연극을 사랑한 국어 교사

박상근은 1941년 포항시 북구 두호동에서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포항동부초등, 포항중·고, 경북대를 졸업했다. 학창 시절 줄곧 반에서 1·2등을 차지하던 영민한 학생이었다. 지역 연극계 원로이자 박상근의 연극계 직계 후배인 김삼일 선생은 "영국의 명배우 로렌스 올리비에를 빼닮은 박상근 선생은 고교 때부터 배우의 길을 걷고 싶어했다.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하려 했으나 집안의 반대로 경북대 사범대로 진학했다"고 말했다.

대학 진학 후에도 배우를 향한 박상근의 꿈은 꺼지지 않았다. 입학과 동시에 연극반에 들어갔으며, 영문학자이자 극작가인 김홍곤 교수의 영향을 받아 셰익스피어 작품을 탐독하곤 했다. 배우가 되기 위해 경북대 수의학과에 다니던 동갑내기 대학 친구인 배우 신충식과 서울로 떠나려 했지만 집안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박상근은 결국 집안 어른들의 바람대로 국어 교사가 됐지만 연극계와 연결된 끈을 절대 놓치지 않았다. 박상근 선생의 딸 박세희(극단 대구무대 전 대표)씨는 "아버님은 평소 연극을 하려면 평교사로 지내는 것이 좋다며 승진에 신경을 쓰지 않으셨고 1999년 대구 남산고에서 평교사로 퇴직하셨다. 평소 집보다 연극에 돈을 많이 쓰기도 했지만, 어머님 역시 아버지의 일에 관심이 많으셨다. 언젠가 남산고 제자들이 취재를 왔었는데 '나는 다시 태어나면 선생질은 안 하겠지만 연극은 꼭 다시 할 것' 이라고 한 적도 있다"며 아버지의 평소 모습을 떠올렸다.

동시대 연극인들은 박상근을 '인정 많은 선배'로 기억하고 있다. 연극인의 벌이가 시원치 않았던 1960년대 교직에 몸담고 있었던 박상근의 사정이 그나마 나았던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후배 사랑은 유별났다. 원로 연극인 김삼일은 "박상근 선생은 매우 인정이 많은 분이었다. 1960년대 초반 대구에서 연극을 할 때 마땅히 숙식할 곳이 없을 때 나를 자신의 자취방에 데려가 숙식을 해결해준 의리 있는 선배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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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극단 대구무대의 공연 '열개의 인디언 인형'에 출연한 박상근(왼쪽). 〈박상근 선생 딸 박세희씨 제공〉

◆정통 리얼리즘 연극으로 대구 연극 초석

박상근은 1960년대 초 한국연극협회 경북지부 주관의 경주신라문화제 연극 공연에 참여하면서 기성 연극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때 저명한 연출가 하병천 선생을 만나면서부터 정통 리얼리즘 연극을 전수하게 된다. 
정통 리얼리즘(사실주의) 연극은 과장된 연출이 주를 이뤘던 '신파'와는 확연히 구별됐다. 


6·25전쟁 당시 리얼리즘 연극을 익힌 유명 배우들이 대구로 내려온 것도 박상근의 예술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피란 연극인들의 영향으로 1953년에는 대구에 국립극장까지 생겼다. 문인 유치진을 비롯해 황정순·최무룡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대구에서 활동했다. 당시 대구의 대학생들이 서구 주류 연극의 연기와 연출법을 공부하는 연구생으로 참여했다. 박상근은 이들이 대구에 남긴 리얼리즘 연극의 전통을 이어받아 이필동 등과 더불어 대구 연극 1세대의 초석을 다질 수 있었다.

박상근은 연극인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던 중에도 늘 지역 연극인들의 통합을 강조했다. 김삼일 선생은 "평소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박상근은 연극을 통해 이익을 챙기려는 움직임을 가장 싫어했다. 직선적 성격으로 잘못된 것은 목소리를 높여 후배들을 질책했다"며 과거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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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극단 대구무대의 공연 '쥐덫'에 출연한 박상근(오른쪽). 〈박상근 선생 딸 박세희씨 제공〉

실제로 박상근은 해체됐던 지역극단들을 합치는 데 주력했고, 지역 연극인들의 합동공연에 힘썼다. 박상근은 1996년 영남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서울 인기극단의 단순한 지방 순회공연은 지역 연극인의 설 자리를 잃게 하지만, 지역 연극인이 동참하는 합동공연은 연극인구의 저변 확대와 극단 간 교류라는 측면에서 좀 더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박상근을 중심으로 1984년 창단한 극단 대구무대 역시 대구 연극을 대표하던 극단 공간을 중심으로 5개 극단을 하나로 합친 극단이었다.

박상근은 대구시립극단의 창단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박상근은 1970년대부터 대구시립극단 창단의 필요성을 주장하곤 했다. 1980년대에는 대구시립극단 창단을 위한 세미나도 여는 등 시립극단 창단에 큰 관심을 두었다. 

1990년대가 되자 대구시립극단 창단 준비위원회의 주역으로 대구시장과 관계자들을 만나 극단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당시 박상근은 "(교사인) 나는 살 만하니 후배 배우들도 안정적인 삶을 이어가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시립극단 창단에 열정을 쏟았다. 결국 1998년 대구시립극단이 창단되고 대구 연극계는 한 단계 도약을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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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배비장전' 분장실에서 동료들과 함께한 박상근(가운데). 〈박상근 선생 딸 박세희씨 제공〉

◆무대를 그리워한 연극행정가

박상근은 1999년 교직에서 은퇴한 후 오롯이 배우로만 살아가길 꿈꿨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은퇴 2년 만인 2001년 세상을 등졌기 때문이다. 연극협회장 등 연극행정에 노력을 기울였던 박상근은 늘 배우의 길을 그리워했으나 대구 연극계에서 자신의 위치와 책임감 때문에 연기에만 집중하지 못했다. 


박상근의 딸 박세희씨는 "연극행정에 힘쓰셨던 아버님이셨지만 늘 배우의 길을 원하셨다. 배우로서 만족할 만한 작품을 못 했다는 것도 아버님이 퇴직 후 배우의 길을 원한 이유였다"고 말했다. 

박상근 선생은 2000년 영남일보와의 환갑 기념 공연 인터뷰에서도 "(1960년 데뷔 연극 '왜 싸워'에서) 대사도 몇 마디 없는 그 역할을 하면서 사시나무 같이 떨던 기억이 생생한데 벌써 40년이 됐습니다. 되돌아보니 남겨놓은 게 없는 것 같아 허전한 마음이 앞섭니다. 늘 의욕만 앞섰지 제대로 해 놓은 것도 없고…"라며 연기에 대한 식지 않은 열정을 드러냈다. 

박상근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공연 연습을 할 정도로 연극에 대한 고집을 꺾지 않았다. 박상근의 딸 박세희씨는 "아버지는 늘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어떻겠느냐'라며 치열한 배우로 살아가시려 했고, '연극'이라는 예술에 대한 '진정성'이 가득한 예술인으로 기억되길 원했다. 평소 아버님의 소신이었던 (연극에 대한) '진정성'이야말로 지역 연극계가 기억해야 할 유산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공동기획 대구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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