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중심에 선 예천人 .4] 일제강점기에 국문학 연구...4·19땐 시위 주도...민족에 살고 민족에 죽고자 했던 조윤제

  • 김진규 소설가·박관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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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11-29   |  발행일 2021-11-29 제11면   |  수정 2021-11-29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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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지보면 지보리에 세워져 있는 삼선생공적기념비. 도남 조윤제를 비롯해 애국지사 조용구·조용필의 기념비가 나란히 서 있다. 가장 오른쪽이 도남 조윤제 기념비. 조윤제는 민족사관에 입각해 국문학의 기틀을 닦은 국문학자로 일제강점기 황무지나 다름없던 국문학 연구에 있어 개척자적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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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남 조윤제

#1. 민족을 위한 학문도 독립으로 가는 길이다

1926년 1월1일 아침, 책상에 펼쳐둔 신문에서 짙은 잉크 냄새가 흘렀다.

'해가 갈사록 우리의 서름은 깊퍼가고 해가 올사록 우리의 감정은 새로워진다. 우리의 세계는 차별, 속박, 우수, 암흑의 세계이다. 차별에서 평등으로, 속박에서 자유로, 우수에서 환희로, 암흑에서 광명으로 새 천지 새 세계를 전개케 하는 것이….'

조윤제(趙潤濟·1904~1976)의 눈이 반짝거렸다. 대구고등보통학교 진학을 위해 고향 예천 지보리(知保里)를 떠난 지 거의 5년. 스물둘의 나이에 바로 그 새 천지, 새 세계가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독립운동을 하려면 밀고 나가야 한다."

1924년 경성제국대학에 예과(豫科)가 창설되자마자 문과 제1회 학생으로 입학했다. 그리고 지금은 법문학부 문학과 진학이 코앞이었다. 그것도 유일한 조선어문학 전공자였다. 출세가 보장되는 법학이나 의학 계열이 아닌 조선어문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독립운동에 대한 갈망!

조윤제는 생육신 조려(趙旅)의 16세손이었다. 퇴계 이황을 지극히 존경해 도산서원의 남녘에서 태어났다는 뜻에서 호를 도남(陶南)으로 짓기까지 했다. 의기 넘치는 성정다운 행보였다.

그런데 입학 후 얼마 되지 않은 4월25일 순종이 승하했다. 장례일은 능 조성이 끝나는 6월10일로 잡혔다. 일제는 장례식을 빌미로 조선 민중들이 봉기라도 일으킬까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 실제로 수많은 학교와 단체에서 시위를 준비하는 가운데 조윤제도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가슴은 뜨거웠으나 우여곡절 끝에 활동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뜻만 있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후로도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조윤제는 낙심했다.

"동지가 많은 만주로 망명할까?"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달리했다.

"민족을 위한 학문도 독립으로 가는 길이다. 우리 민족정신의 결정체인 고전문학 연구가 내 할 몫이다."


경성제국대 입학 조선어문학 전공
조선어문학회·진단학회 결성 주도
조선문학을 학문 인식한 최초 학자
'조선시가사강' '국문학사' 등 펴내

1948년 남북협상 참여 등 통일운동
4·19혁명때 대학교수단 시위 앞장
1974년 72세로 영남대서 정년퇴임
묘비명 '민족에 살고 민족에 죽는다'



#2. 조선문학을 학문으로 인식한 최초의 학자

조윤제는 학문에 열중했지만 환경이 너무도 열악했다.

"스승도 선배도 없는 것이 황무지나 다름없구나."

홀로 손품과 발품을 파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에 관계된 문헌이라면 모조리 뒤졌고 국문학과 관련됐다 싶으면 무조건 끌어 모았다. 그렇게 고군분투한 끝에 논문 '조선소설의 연구'를 제출하고 졸업했다.

이후 조윤제는 3년간 법문학부 조수로 지내며 학자로서의 기초를 보다 탄탄하게 다졌다. 1931년에는 전공 후배들과 '조선어문학회'를 결성해 '조선어문학회보'를 발간하기도 했다. 국문학 잡지로서는 최초였다. 그러던 1934년 봄, 역사학자이자 민속학자인 이병도(李丙燾), 송석하(宋錫夏), 손진태(孫晉泰) 등과 의기투합했다.

"우리의 역사, 언어, 문학을 조선총독부와 일본인 학자들이 주도하는 작금의 현실을 타개해야 하네."

"지당하이. 우리 것이니 우리 힘으로 연구하고 우리 글로 발표하세."

"하면 우리 학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이름으로 무엇이 좋겠는가?"

"'진단'이 어떠한가? 예로부터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을 이르는 이름이 아닌가."

이로써 '진단학회(震檀學會)'가 탄생했다.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학문을 통해 일본에 항쟁한다는 뜻이었다. 학계에 활력이 일었고, 조선 관련 학문에 대해서만큼은 권위도 세울 수 있었다.

조윤제가 동분서주하는 동안 그의 은사가 '향가 및 이두의 연구'를 통해 향가를 해독해 내놓았다. 문제는 그 은사가 일본인 교수 오쿠라라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이를 두고 일본학계에서 자기들끼리 이러쿵저러쿵 논쟁까지 벌였다. 향가는 조선의 얼, 정신, 이념이 반영된 문학이었다. 그럼에도 이를 설명할 수 있는 개념적 장치가 없다 보니 벌어진 일이었다. 조윤제는 조선학자로서 참담함을 느꼈다. 그리고 결심했다.

"우리 시가는 내가 연구할 것이다."

조윤제는 시가의 형식을 중심으로 시가사(詩歌史)를 체계화했다. 발생(發生)시대, 향가(鄕歌)시대, 시가한역(韓譯)시대, 구악(舊樂)청산(淸算)시대, 가사송영(誦詠)시대, 시조문학발휘시대, 시가찬집(撰集)시대, 창곡(唱曲)왕성시대로 역사를 나누고 각 시대의 개관·양식·작품에 대해 논술했다. 그리고 이를 1937년에 '조선시가사강(朝鮮詩歌史綱)'으로 펴냈다. 이 저서는 우리 시가의 역사를 다룬 최초의 글로 조윤제의 왕성한 저술 활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2-1_조선시가사강
조윤제는 생전에 우리나라 국문학사에 획을 그은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왼쪽부터 '조선시가사강' '교주 춘향전' '한국시가의 연구' '국문학사'.

#3. 실천적 지식인의 민족사관

'조선시가사강'이 학계를 뒤집어놓은 바로 그해에 조윤제는 '교주 춘향전(校註 春香傳)'을 탈고했다. 본디 전공이 소설사였으니 그에 걸맞은 결과물이었다. 이 책에서 조윤제는 '춘향전'을 국문학의 백미로 인정하고 원전 비판의 새 방법을 제시했다. 이후 조윤제는 학문에 더 매달렸다. 하지만 현실이 받쳐주지 않았다.

"연구할 시간도, 집필할 시간도 부족하니 이래서야 곤란하다."

결국 1939년 3월 근무하고 있던 경성사범학교를 사임했다. 보성전문학교 도서관에서 살다시피하며 연구에 전념하고 자신의 학문을 재검토했다. 도서관장 손진태(孫晉泰), 대학 후배 이인영(李仁榮) 등과 토론하며 민족사관 입장 또한 공고히 했다. 한마디로 우리 민족의 우수성과 우리 역사의 주체적 발전을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곧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조윤제는 경신학교·천주교신학교를 비롯한 여러 학교에서 강사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던 1945년 8월 광복이 됐다.

"민족된 자로서 어느 누가 감격하지 않겠는가만,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시작한 국문학 연구에서 성과가 나타나자마자 민족해방이 왔으니 이 감격을 더 주체할 수가 없다."

조윤제는 '우리 민족의 혈관을 흐르는 민족정신의 고동이 내 심금을 울리는' 감격 속에서 경성대학 법문학부 재건의 책임을 맡았다. 비로소 안정적으로 연구와 저술에 몰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과물은 혁혁했다. 1948년 출간한 '조선시가의 연구'가 시작이었다. 우리 문학을 양식별로 고찰한 첫 사업이었다. 이듬해에는 민족사관에 입각해 국문학의 형성과 발전을 체계화한 역작 '국문학사'를 펴냈다. 이 저서를 기본으로 삼아 국문학 연구가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6·25전쟁 후인 1955년에는 '국문학개설'을 내놓았다. 국문학을 다각적으로 분석, 고찰한 국문학개론 계열의 효시였다. 이어서 1963년에는 '국문학사'를 개정한 '한국문학사'를 출간했다.

우리 문학을 학문으로 인식한 최초의 학자 조윤제는 민족해방과 통일을 위해 헌신한 실천적 지식인이기도 했다. 1948년의 평양 남북협상에 참여했고, 1960년 4·19혁명 당시에는 대학교수단 시위를 주도했다. 이후 통일운동에 참여하던 중 1965년 한일협정 비준에서 비롯된 대일굴욕외교 반대투쟁에 가담했다. 그 과정에서 형무소에 끌려간 것도 모자라 대학에서 추방되는 고초도 겪었다.

#4. 고향 지보에 대한 애정

조윤제는 나라에 대한 사랑만큼이나 고향에 대한 애정도 남달랐다. 6·25전쟁 당시 서울대 문리대학장으로 있던 그는 인민군에게 붙들렸다가 풀려난 뒤 고향 지보리로 돌아가 칩거했다. 동족상잔의 슬픔 속에서 선조들이 살던 땅을 밟다 보니 절절함이 솟구쳤다. 아버지 조용범(趙鏞範)과 어머니 청주한씨(淸州韓氏)의 품에서 근심 걱정 없던 어린 시절도 가슴이 시리도록 그리웠다. 그는 자신의 심사를 시(詩) '지포팔경(芝圃八景)'으로 옮겼다. '지포'는 '지보'의 별칭이다.

달을 안은 태을산, 백운 토하는 만기봉, 봉산 나무꾼 노랫소리, 낙동강 어부 피리소리, 다 지켜보는 서산 기린, 와우대에서 본 농경, 학강나루 배, 지보암 저녁 종소리, 이렇게 여덟 개의 경치마다 고향의 안태를 빌었다.

1952년 서울로 돌아간 조윤제는 성균관대 대학원장 및 부총장, 청구대학 교수 등을 거쳐 1974년 2월 영남대에서 정년퇴임했다. 그의 나이 72세였다.

우리나라 학술발전에 미친 조윤제의 공로에 나라도 경의를 표했다. 1963년 제8회 대한민국학술원상 공로상 수상자로 선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해 조윤제는 훗날 자신의 무덤 앞에 세울 묘비명을 직접 썼다.

'민족에 살고 민족에 죽는다!(生於民族 死於民族)'

글=김진규<소설가·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 : 예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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