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명 이상의 지역 서예인을 배출하며 '봉강서계'를 만든 소헌 김만호의 환갑을 축하하기 위해 전국 명사급 서예인 25명이 휘호를 보내온 걸 한데 모아 만든 송수병(頌壽屛). 호남의 경우 의재 허백련, 강암 송성용, 남농 허건, 송곡 안규동이 휘호를 보내와 영호남 서화교류의 끈끈한 정을 보여주었다. <소헌미술관 제공> |
조선 시대에는 조맹부의 송설체가 전기에 대유행을 했다. 안평대군 이용이 대표 서가이다. 중기에는 조선성리학의 대두로 인하여 조선고유색이 나타났다. 봉래 양사언, 고산 황기로, 석봉 한호 같은 대가들의 출현이다. 더불어 퇴계 이황의 단아한 서체는 영남유학의 대표적 서체로 자리 잡는다. 역시 영남의 초서체는 구미에서 살다간 고산 황기로에 의해 잘 정리된다. 이 시기 대구경북의 주류서체는 안동의 퇴계 이황의 영항이 많았고 서원문화를 중심으로 영남선비들은 둥근 원필이 가미된 단아한 서체가 선호되었다.
팔하 서석지(1826~1906)는 대구에 거주한 서가였다. 당시 전주에 거주한 창암 이삼만이 대구약령시에 올 때 서석지를 지도하였다. 서석지의 영향을 받은 석재 서병오는 말년에 밝힌 대로 퇴계 이황의 인품과 서품 그리고 추사 김정희 서법에 영향을 받았다고 직접 알리고 있다.
교남 지방 대구는 본격적인 예술로서의 서화는 석재 서병오(1862~1936)를 출발로 삼고 있다. 서병오는 어린 시절부터 추사문하의 대원군 석파 이하응과의 교류로 날렵한 문인화를 그렸다. 중년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몇 년간 주유하면서 상하이 해상파의 오창석, 제백석, 포화, 양보광 등과 친교를 가지며 직접 영향을 주고받았다. 그의 아호가 보여주듯 '석재'는 돌로 만든 집으로 영원히 깨트릴 수 없는 문화예술의 영역이라는 의미처럼 영남지역뿐만 아니라 한국 근대서화사에 거벽으로 우뚝 솟았다. 서병오는 추사가 밝힌 대로 '잘되고 못된 것을 따지지 않는다'라는 불계공졸을 주장하며 파격적이고 호방한 예도의 길을 걸었다.
석재의 애제자로는 긍석 김진만(1876~1933)이라는 독립운동가의 '창엄오가'한 서화가의 출현이다. 대구 반월당 지역에 거주하면서 석재와 함께 수년간 중국을 주유하였다. 대다수 작품은 사군자를 그렸지만 기년과 장소를 쓰지 않고 오직 '긍석'이라는 아호만으로 수결한 것이 특이하다.
경재 서상하(1864~1949)는 서병오와는 동시기로 영남의 대표적 사대부 서화가였다. 1921년에 활동한 경성의 서화협회 정회원에 서병오, 곽석규, 서상하 3명이 함께 출품하고 활동하였다. 문인화 중 매화와 소나무를 잘 그렸다. 또한 전각에 심취하여 독특한 자법과 장법의 문자인과 낙관을 볼 수 있다.
회산 박기돈(1873~1947)은 교남시서화회의 부회장을 역임한 영남의 대표적 서예가였다. 초대 대구상무소장을 역임하면서 많은 공헌을 하였다. 글씨서체는 청대의 하소기서체에 심취하면서 행초서와 전서체에도 일가견을 가졌다. 현재 계산동에 박기돈 고가의 집이 남아있고 근래에 대구문화재단에서 박기돈의 현창 유묵전을 개최한 바 있다.
죽농 서동균(1903~1978) 문인화가는 영남지역을 대표하는 서화가였다. 석재 문하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서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초기에는 안진경과 하소기체의 영향을 볼 수 있다.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20세 때부터 사군자부문에 명성을 날렸다. 묵법의 섬세함과 농담의 표현으로 대나무와 매화그림에서 세련미 있는 죽농풍의 작품을 선보였다. 죽농의 문하에는 영남서화원의 죽농서단을 중심으로 여전히 서맥을 훌륭하게 전승하고 있다. 때마침 요즈음 DAC대구문화예술회관 30주년기념 '시대의 선구자 특별전'에 죽농 서화 대표작 60여 점을 선보이고 있다.
김진혁〈석재 서병오기념사업회장·학강미술관장〉 |
김진혁〈석재 서병오기념사업회장·학강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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