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24) 서동진] 서양화 재료와 서양 화풍 보급·전파한 대구 근대미술의 대부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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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12-06   |  발행일 2021-12-06 제20면   |  수정 2021-12-06 12:01
1920~30년대 대구거리·시골·사찰 풍경 다양한 소재 담아…서양화 회화적 표현기법 전수
이상화 등과 서양화 단체 '향토회' 발족 주도...6·25전쟁 후 정치·사회 활동에도 주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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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허(小虛) 서동진(徐東辰·1900~1970)은 '대구 근대 미술의 대부'로 불린다. 그는 대구 최초의 서양화가인 이상정의 제자로 오늘날 종합예술센터라고 할 수 있는 '대구미술사(大邱美術社)'를 설립해 서양화 재료와 서양 화풍을 대구에 보급하고 전파했다. 또 대구 최초의 한국인 서양화가 단체이자 동요부와 시가부가 공존하는 종합예술단체인 영과회에 참여한 데 이어 미술단체인 향토회 창립을 주도하는 등 대구 근대화단을 이끌었다. 천재화가 이인성과 김용조의 스승이기도 한 그는 여러 대구 출신 화가들을 가르치고 등단시켰다. 중년에는 예술가의 길을 계속해 걷지 않고 교육자로 변신했다가 다시 정치가로 변모해 재선 국회의원을 역임하는 등 한국 정치사회 변혁 운동에 매진했다.

◆서동진의 삶과 생애

서동진은 1900년 대구 공평동 21-1에서 대구 유지인 서기수와 윤매주 사이 3남으로 태어났다. 윤매주는 대구교육부인회를 설립한 신교육운동가로 활발한 사회활동을 했다. 그는 서화가로 이름을 떨친 죽농 서동균과 시인 이상화와 한 살 터울의 친구다. 죽농과는 대구 해성학교를 함께 다녔으며, 이상화의 큰 형인 이상정의 제자이기도 하다. 영과회와 향토회에서 상화와 함께 활동했다.

서동진은 1918년 계성학교 입학 후 이듬해 벌어진 3·8대구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퇴학당한 뒤 서울 휘문고보에 재입학해 1924년에 졸업했다. 계성학교 재학 시절에는 미술교사였던 독립운동가 이상정에 사사했고, 휘문고보 재학 때는 우리나라 제1호 서양화가 고희동에게 그림을 배웠다. 휘문고보를 졸업한 그는 다시 대구로 돌아와 계성학교에서 약 6개월 동안 교사로 재직 중 일본으로 2년여간 유학을 갔다. 당시 구체적인 행적은 확인할 수 없지만, 귀국 후 활동으로 미뤄 봐 미술공부를 하며 수채화와 판화제작 기법을 익힌 것으로 보인다. 귀국 후 그는 교남학교(대륜고 전신)에서 26년부터 14년간 무보수로 교사생활을 했다.

서동진 '설경', 1920년대
서동진 '설경', 1920년대
그는 재직 중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해 네 차례(제7·8·10·11회) 입선을 한다. 입선작 '역 부근'(1928), '역 구내'(1929), '오후의 풍경'(1931), '뒷골목'(1932)은 모두 수채화 작품이다. 또 세 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첫 번째 개인전은 1927년 6월11~13일 대구 조양회관에서 열렸는데 풍경화와 인물수채화 등 45점을 출품했다. 당시 신문은 그를 "사계 일류의 청년 화가"라고 소개하고 "대구에서 수채화 전람회가 처음인 만큼 관람자가 매일 무려 1천명에 달하는 성황을 이루었다"고 보도했다. 개인전의 주최는 동아일보 대구지국장이었다.

제2회 개인전(1928년 7월7~9일) 또한 동아일보 대구지국이 주최했다. 당시 신문에선 그를 '대구 양화단의 중진작가' '조선미술계에 일대 활약을 시(始)하는 화백'으로 예우했다. 무영당 백화점 사장 이근무가 후원했으며, 일반인 작가 6명이 14점을 찬조 출품한 것이 눈에 띈다. 김용준, 박명조, 최화수 등 대구의 화가와 일본인 화가 하마무라(濱村文雄) 등이 참여했다. 세 번째 개인전은 2002년 유족(서정섭)의 증언으로 확인됐다. 대구 최초의 백화점인 이비시야 백화점에서 1935년 가을에 열었다고 했지만, 전시자료와 기록이 없다.

서동진은 1927년 대구 수동 62번지에 대구미술사를 설립한다. 주택과 상가를 겸한 복합시설로 건물 규모가 160여 평(528㎡)에 이르렀다. 29년에는 미술교습소로 간판을 바꾸고, 수채화 보급과 미술지도는 물론 석판 인쇄, 도안 제작 등 인쇄시설까지 갖춰 대구문화의 중심 역할을 했다. 서동진은 또한 1927년 이상춘, 이갑기 등 경향파가 설립을 주도한 영과회에 참여했다가 탈퇴하고, 1930년 그와 같은 회원이던 이상화, 김용준, 박명조, 최화수 등과 함께 이념성을 가진 한국 최초의 서양화 단체인 '향토회'를 발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하지만 광복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서동진은 예술가로서의 활동보다 정치 등 사회활동에 적극적이었다. 대구금융조합 감사, 영남일보사 취체역(이사),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경상북도지부 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지역 경제와 문화창달에도 힘썼다. 1950년 6·25전쟁 중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58년 또 낙선한 그는 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대구시 갑 선거구에 나와 당선돼 외교통일위원장을 역임했다. 하지만 61년 5·16군사쿠데타 이후 정계를 은퇴하고, 대구에서 노후를 보내다 1970년 별세했다. 청년기 독립운동을 하다 미술에 심취해 예술가와 교육자의 삶을 살면서도 조국의 미래를 걱정한 그는 제국주의와 독재와는 거리를 둔 민주주의를 신봉한 인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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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진 '뒷골목', 1932
◆서동진의 작품 세계와 평가

서동진은 주로 1920~30년대 대구 부근 거리와 마을 등 풍경을 주제로 삼았다. 보경사나 법주사와 같은 사찰 풍경도 그렸다. 해금강 등 동해안 명소, 자화상과 소녀의 모습 등 다양한 소재를 다뤘다. 특히 24세와 27세에 그린 '자화상'은 '모던 보이'를 연상시킨다. 전자는 지금과 같은 댄디한 머리 스타일에 양장을 한 채 나비넥타이를 맨 모습, 후자는 흰 와이셔츠 깃을 올린 모습에서 유행을 선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서동진의 작품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현장에서 사생한 시골 풍경이다. 당시 거리나 건물, 생활상, 패션 등을 아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황금기였던 그의 1930년대 작품들은 현재 거의 남아있지 않으며, 조선미전에 출품했던 도판으로 당시 서동진의 작품세계를 살펴볼 수 있다.

제7회 조선미전 입선작 '역부근'은 대구역 앞에 서 있는 마부의 모습과 그 주변에 보이는 앙상한 나무들, 그리고 바위 옆에서 한복을 차려입은 남녀가 대화하고 있는 장면을 수채화로 표현했다. 무딘 붓질이 눈에 띄며, 대상을 화폭에 옮겨놓은 듯하다. 작가는 작품 속 바위를 칠성바위라 했다. 대구역 뒤 칠성바위는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서동진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말에게 먹이를 주며 바위에 기대 휴식을 취하는 모습을 보고 피지배의 입장에서 민족적인 안타까움과 서러움을 느껴 화폭에 옮겼다고 했다.

서동진의 두 번째 개인전은 첫 번째보다 작품 소재가 확대됐다. 공장과 교회, 기차역 등 소재를 선택한 시야가 넓어졌으며, 인물화도 전보다 훨씬 다양해지고 작품 수도 많아졌다.

제10회 조선미전 입선작 '오후의 풍경'은 개천에서 빨래하는 두 여인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제11회 조선미전 입선작 '뒷골목'은 그의 대표작이라 불리는 작품이다.

일본식 목조가옥, 흰 철제 담장, 전신주, 간판, 리어카 등을 배경으로 행인이 걸어가는 일상 속 도회 풍경인데, 대구의 어느 거리를 그린 듯하다. 신문물인 서양화를 도입해 회화적인 표현기법을 전파한 그는 대구미술사의 선구적 인물이다. 또한 서양화에 담긴 새로운 문화양식도 함께 전수하는 등 대구 근대화단에 신선한 예술적 분위기를 형성했다는 점은 재조명돼야 할 것이다.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공동기획 대구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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