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채한의 사람과 선(線)] 일몰과 일출 사이...저 수평선 아래로 疫病의 어둠 살라먹고 고운 해야 솟아라

  • 김채한 전 달성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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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12-17   |  발행일 2021-12-17 제38면   |  수정 2021-12-17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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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일몰과 일출, 해넘이와 해돋이는 상대적인 것 같지만 이웃이다. 그저 수평선 아래로 태양이 지는 것과 수평선 위로 태양이 뜨는 그 차이. 그 차이 속에 우주의 곡선이 수더분하게 진행되면 자정에서 새벽-여명- 박명- 일출- 아침- 낮- 저녁- 일몰- 박모. 밤에서 다시 자정으로 순환하는 이치가 선과 곡선이질 않는가. 빛의 파장. 소리도 마찬가지다. 경주 문무대왕면 황새바위 일출.
힘겨운 코로나 시대를 지나고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자괴적인 말들이 무심결에 툭 툭 튀어 나온다. 전문가들이 위정자들과 돌아가며 쉽게 때로는 어렵게 온갖 방법으로 설명을 하지만 듣는 이들은 늘 시큰둥이다. 코로나를 볼모로 삼지 말라는 항변도 심심찮게 들린다. 역학적·사회적·경제적·문화적 관점에다 정치적 관점들이 엉켜 묘한 갈등의 등식이 전개된다. 결국은 백신이 이길 거라는 주장이 세다. 걸리면 재수도 없거니와 손해도 이만저만 아니다. 목숨까지 담보해야 되니 셀 수밖에 없다.

코로나 후 일상이 된 비대면·언택트
새해 불쑥 떠오르는 해맞이 추억들
올해 해돋이도 잇단 취소로 아쉬움

일출보다 감성적으로 젖기쉬운 일몰
국내 3대 낙조와 지리산 반야봉 노을
도심에서 즐기는 앞산 해넘이 전망대

시인이 읊는 생명력 넘치는 붉은 태양
마음 한 곳 녹이는 해질녘 붉은 장관


◆코로나 종식

그래서 '코로나가 종식되면…'이라는 가정법이 마치 코로나가 종식된 듯 널리 입에 오르내린다. 종식은 엄청난 해방감으로 지구촌을 달굴 것이다. 어떤 조사에서 '코로나가 종식되면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뭐냐'는 질문에 25%에 가까운 응답자가 해외여행을 꼽았다. 그러면서 주목할 만한 점은 응답자 중 30%는 마스크를 꼭 착용하고 여행하겠다니 이미 코로나다운 습관에 매우 익숙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스크 한 장에 담긴 의미라지만 결코 소홀할 수 없는 변화다. 그러나 이 변화는 엄청나다. 비대면, 언택트, 오하운(김난도 교수의 '오늘 하루 운동') 등 변화들로 상징되는 용어들은 셀 수 없이 나오고 그 쓰임새 또한 눈부시다.

그래도 우리 일상에서는 변하지 않는 게 아직은 더 많다. 송구영신(送舊迎新). 해마다 늘 그랬다. 묵은 해는 너그럽게 보내고 새로운 해는 즐겁고 희망차게 맞는다. 그렇지만 코로나로 만만치가 않다. 전국의 이름난 해넘이 해돋이에는 공식 행사가 대부분 취소다. 공식행사라야 그 지역 지자체 자랑이 대부분이어서 크게 안타까울 일은 없다. 한 해를 잘 보내고 또 새로운 해를 잘 맞으려는 여행객 에게는 그러나 코로나가 부담이다. 더욱이 명소에서는 말이다.

'황색 리본을 한 여자'. 오래된 서부 영화다. 존 포드 감독과 존 웨인이 만들었다. 요즘도 영화채널에서 더러 볼 수 있다. 서부영화들이 그렇듯 악당을 물리치고 난 후 광활한 대지에 일출보다는 일몰의 아름다움이 흔하게 펼쳐진다. 이 영화도 끝 무렵 서부 캘리포니아의 일몰 정경은 멋지다. 말이나 글로 표현하는 것보다는 상상하는 게 훨씬 리얼하고 풍요롭다. 특히 미국 서부 유타주 남부에 있는 브라이스캐니언 등 보라색과 붉은 색이 조화를 이룬 석양이 세계인들을 감탄시킨다. '첫사랑'으로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러시아의 이반 세르게이비치 뚜르게네프. 그의 '사냥꾼의 수기'에 '저물어 가는 태양은 마지막 광선을 넓은 적자색 무늬로 분산시키고 있다'는 대목이 있다. 비슷한 느낌이고 장관이다.

전북 부안군 변산 반도 일몰
전북 부안군 변산 반도 일몰.
◆일출과 일몰의 장관

장관인 것은 일출도 마찬가지다. 일몰보다 일출이 훨씬 다가오는 느낌이 강하다고나 할까. 그것은 새해를 비롯해 매일 아침 새날이 밝아 온다는 이미지 탓일 것 같다. 노랫말처럼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다. 그에 비해 다가오는 것은 상상력을 뛰어넘는 희망에 모두들 가슴이 부풀기 때문이다. 유명관광지 해돋이 명소가 그래서 새해 첫 새벽 붐빈다.

정동진, 영종도, 지리산 노고단, 경주 토함산, 문무대왕암 앞 동해바다, 한려해상 초양도, 가야산 심원사, 설악산 울산바위, 소백산 연화봉, 비슬산 대견사, 울릉도 성인봉, 동해 추암, 무주 덕유산 정상…. 이루 헤아리기조차 거북한 해돋이 명소들. 특히 새해 꼭두새벽이면 동해의 그 불쑥 오르는 첫 해를 보기 위해 부모 등쌀에 춥고 졸리고 배고픈 아름다운 기억들을 간직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에 비해 해넘이는 최근 들어 엄청난 감성적 이미지를 보이며 사람들이 모인다. 잘 익은 걸작의 오페라 관객 끌기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동해 강릉의 정동진이 있다면 서해의 정서진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인천이다. 연안부두에서는 낙조를 유람하기 위한 배가 뜬다. 우리나라 3대 낙조라는 태안해안 꽃지해변, 변산반도 채석강과 격포, 강화도 석모도에 이어 지리산 반야봉 노을은 바라보는 동안 행복하다. 사진교과서로 불리며 전국의 일출과 일몰 사진을 담은 사진집을 2000년에 낸 배원태 사진작가는 경북 청도 오부실 마을 혼신지 일몰도 별미 같은 일몰의 맛이 있다고 소개한다. 근래에는 대구 앞산 해넘이 전망대가 설치돼 조금은 억지스럽긴 해도 도심의 찌든 마음을 잠깐 씻는 역할은 할 것 같기도 하다.

해넘이냐 해돋이냐를 두고 흡사 경쟁이나 하듯 경솔히 말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적으로 해, 즉 태양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태양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태양계의 중심이다. 태양을 중심으로 8개의 행성, 즉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등이 돌고 여기에 명왕성이 있다지만 명왕성은 왜성행성이어서 행성에서 퇴출됐으니 태양계의 행성은 지구를 포함해 여전히 8개가 맞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아직도 태양계를 안다고 할 만큼 알지는 못하고 있다. 그런 태양계의 중심 태양이 그의 빛으로 빚어내는 해넘이 해돋이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가. 노르웨이 출신인 표현주의 대가 뭉크의 작품 '절규'는 어린시절의 좌절과 고뇌가 듬뿍 담긴 걸작이다. 그러나 뭉크는 이런 어려움을 태양을 보며 삶에 대한 생생한 희망을 가지게 됐으며 밝게 빛나는 생명력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졌다. '절규'의 붉은 윗부분은 세상의 무엇과도 비유될 수 없는 이글거리고 넘실대며 생명력 넘치는 태양의 붉은 색이다.

◆박두진 시인의 해

영국 속담에도 있다. '아침 해는 종일 계속되지 않는다'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더 매서운 속담을 지니고 있다. '당신이 거들지 않더라도 태양은 스스로 저물어 간다'. 물론 당신이 거들지 않더라도 태양은 스스로 떠오르기도 한다. 간결하고 명료한 문장으로 수사여구가 없다는 평을 받는 헤밍웨이의 '해는 또다시 떠 오른다'는 잃어버린 세대의 특징을 잘 드러냈다는 평가l를 받는다. 그러나 작품의 제목은 내용과는 반대라서 의미심장한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게도 해의 시인이 있다. 박두진(朴斗鎭). 청록파 시인이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그의 시 '해'의 첫 연이다. 문학평론가 권영민 교수는 이 시에는 '호쾌함과 투지'가 깃든 장엄성을 형상화했으며 '부정적 힘을 대결로써 이겨내는 세찬 정열과 야성적 전투의지로써 어둠을 부정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 어둠을 부정하는 일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들은 지금 얼마나 많은 시대의 어둠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는가. 시대의 어둠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공정하지 못하고 민주적이지 못하고 정의롭지 않는 일들이 자행되기 때문이다.

영국의 성직자이자 시인이었던 존 던(John Donne). 그의 시 '해돋이'는 첫 연부터 마치 태양의 물결이 요동치는 듯 힘차다. '귀찮게 간섭하는 늙은 바보, 다루기 힘든 태양아/ 왜 너는 그렇게/ 창문을 통해, 커튼을 통해 우리를 찾아오느냐(이하 생략)'.

나이 들면 다루기가 쉽다는데 존 던은 아니었던가 보다. 그의 기도 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훗날 헤밍웨이가 소설의 이름으로 차용해 영화로도 만들어져 세계인들의 심금을 종처럼 울렸다. 내친김에 읊어보자. '누구든 그 스스로 완전한 섬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한 부분이다// 흙덩이가 바다에 씻겨 내려가면/ 유럽은 그만큼 작아진다/ 모래벌이 씻겨 나가도 마찬가지다// 그대의 친구들 혹은/ 그대 자신의 땅이 물에 잠겨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 왜냐하면 / 나는 인류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해 종이 울리는지/ 알려고 사람을 보내지 마라//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해 울린다'

◆낙동강의 노을

실은 낙동강에도 땅거미 지기 전 해질 녘의 노을이나 일몰 또한 가히 아름답다. 특히 성주대교에서 도동서원에 이르는 구간에 늦여름부터 펼쳐지는 붉은 장관에 가슴은 절로 녹아든다. 프랑스의 모럴리스트 라 로슈코프의 '태양과 죽음은 가만히 바라볼 수 없다'는 말처럼 저렇게 태양이 빛나는 한 모든 이들의 희망은 절로 빛날 뿐이다. 태양을 외면하지 못하듯 어느 죽음인들 외면할 수 있으랴. 그래서 로맹 롤랑은 '태양은 도덕적이거나 부도덕하지 않다. 그는 있는 그대로다. 그는 암흑을 정복한다. 예술도 또한 마찬가지다'라고 절규했었다. 위대한 태양과 위대한 예술의 조화.

결국 일몰과 일출, 해넘이와 해돋이는 상대적인 것 같지만 이웃이다. 그저 수평선 아래로 태양이 지는 것과 수평선 위로 태양이 뜨는 그 차이. 그 차이 속에 우주의 곡선이 수더분하게 진행되면 자정에서 새벽-여명- 박명- 일출- 아침- 낮- 저녁- 일몰- 박모. 밤에서 다시 자정으로 순환하는 이치가 선과 곡선이질 않는가. 빛의 파장, 소리도 마찬가지다. 장수돌침대도 결국은 곡선 파장이 질 좋다는 뜻이 아닐까. 곡선,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느린 곡선 같은 노래가 저쪽서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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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한 전 달성문화재단 대표

'고목'. 장욱조가 부른다. '저 산마루 깊은 밤/ 산새들도 잠들고/ 우뚝 선 고목이 / 달빛아래 외로우네…'.

산새들이 잠들었다니 좀 전 일몰이 지났을 거고, 산새들이 잠들었다니 곧 일출일 테지.

글=김채한 <전 달성문화재단 대표>
사진=배원태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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