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칼럼] 톨레랑스를 다시 생각한다

  • 김영우 동반성장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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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3-02   |  발행일 2022-03-02 제26면   |  수정 2022-03-02 07:13
'네거티브' 치중한 대선 코앞
진영간 대립 첨예한 정치권
경청과 포용하는 자세 절실
정치적 합의가 필요한 과제
톨레랑스 실천으로 풀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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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우 (동반성장연구소 연구위원)

프랑스의 중서부 도시 낭트는 칙령(edit de Nantes)으로 역사책에 등장한다. 대서양 연안에서 50㎞ 떨어진 루아르 강가에 자리한 이곳은 로마 시대부터 항구로 번창했고 가톨릭 교구가 위치했다. 그러나 850년 영국의 브리튼 사람들이 점령하면서 브레타뉴 공국이라 불렀고 오랫동안 이곳을 통치했다. 1491년 프랑스 샤를 8세가 브레타뉴 공주와 결혼하면서 두 나라 사이의 오랜 갈등은 봉합되는 듯했다.

그러나 1562년부터 1598년까지 일어난 종교 전쟁은 프랑스를 양분시켰다. 당시 낭트지역은 가톨릭 세력의 거점이었고 브레타뉴 총독은 개신교도였던 앙리 4세의 프랑스 왕위 계승에 강하게 반대했다. 종교적 갈등은 정치적 갈등으로 번져 전쟁은 불가피했다. 1598년 앙리 4세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개신교에 대한 차별을 없애고 포용하는 낭트칙령을 내려 약 30년의 종교전쟁을 종식시켰다. 이때 등장한 개념이 바로 톨레랑스(tolerance)였다.

톨레랑스는 '지지한다'는 뜻의 라틴어 '톨레라레(tolerans)'에서 유래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포용, 인내로 개념이 확장되어 중세 프랑스어에서 정착되었고 낭트칙령이 나올 무렵 '관용'이라는 의미가 더해졌다. 한편 건축에서는 시공이나 도면에서 용인할 수 있는 오차범위로 사용된다. 오늘날에는 종교적 의미뿐만 아니라 사회적·정치적으로 '상대방을 받아들인다'라는 의미로 확장되었다.

낭트칙령은 다른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포용이었다. 그러나 이를 반대하던 광신적인 구교도에 의해 앙리 4세는 암살당하고 손자였던 루이 14세는 1685년 10월 낭트칙령을 폐지했다. 이때 수십만 명의 개신교도들이 다시 희생되었고 국론이 분열되어 대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갈등을 해소하는 방안으로 톨레랑스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어왔다.

철학자 존 로크는 위정자들이 신앙의 문제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관용이라고 보았다. 사회학자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다수결에 따른 민주적 권력의 횡포를 비판하며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강조했다. 이처럼 종교 문제에서 출발한 톨레랑스는 종교적 대립이 정치의 위기를 초래하자 정교분리로 나아갔고 다수는 소수의 사상도 중시하는 다원주의로 발전했다.

20대 대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선거는 지구온난화,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지구촌의 위기 속에서 실시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대내적으로는 코로나가 만든 새로운 양극화, 잠재성장률 하락, 기업간의 격차 확대, 심각한 저출산 등 해결해야 할 당면과제가 수북하다. 하지만 이런 이슈에 대한 정책대결은 들리지 않고 네거티브에만 치중해 역대급 '비호감 대선'이라 평가받고 있다.

더 큰 문제는 대선이 끝나도 진영대립에 갇혀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당면문제를 해결하려면 정치적 합의가 필요한데 지금의 진영논리로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여기서 나와 이념적 차이가 있을지라도 '틀렸다'는 독단보다는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고 포용하는 자세가 절실하다. 해법은 다양성을 인정하는 톨레랑스의 실천에서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김영우 (동반성장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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