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과 한국문학] 옷소매 한글 편지

  • 안주현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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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3-17   |  발행일 2022-03-17 제22면   |  수정 2022-03-17 07:24
선조들 한글 읽고 쓰는 모습
생동감 있게 표현한 '옷소매…'
드라마 연출 상상력에 감탄
여성들의 감정·사상 표현한
한글편지 시청자에 감동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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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현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연구교수)

역사 드라마는 재미있다.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 각본가의 흥미진진한 대본, 연출자의 짜임새 있는 편집 때문일 수도 있지만, 때로 역사적 사실 자체가 드라마보다도 더 '드라마틱'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기리에 방영을 마친 '옷소매 붉은 끝동'은 정조와 그의 후궁인 의빈 성씨의 삶을 왕과 그에 딸린 후궁이 아니라 여자와 남자, 개인 대 개인의 관계로 풀어나간 드라마이다. 그런데 필자처럼 역사 자료를 다루는 연구를 하는 사람들은 드라마 연출의 상상력에 감탄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직업병 덕분에' 화면 구석에 소품으로 놓여 있는 종이 한 장에 몰입을 방해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곽장양문록'을 필사한 의빈 성씨와 세손 시절부터 한글 편지를 쓰던 정조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한글을 읽고 쓰는 장면들이 자주 연출돼 더 흥미롭게 드라마를 볼 수 있었다.

18세기 말은 인구와 신분 구성의 변화로 보았을 때 사회·경제적 변화가 활발하게 일어났으며, 한글을 읽고 쓰는 사람들의 수도 상당히 증가하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시기이다. 드라마에서도 글씨를 쓰거나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을 통해 성덕임의 인물됨을 드러냈고, 미처 다 전하지 못한 마음은 편지의 형식으로 바뀌어 시청자들에게 울림을 주었다. 그러나 조선일보 1929년 5월11일 기사('생활개신과 상식보급(칠) 문자도 모르는 동포 일천오백만')나 1948년 미군정 보고서를 참고하였을 때 20세기 초까지도 조선의 문맹률은 80~90% 정도였다고 볼 수 있다. 또 갑오개혁(1894년) 때 공문식(公文式·공식 문서에 한글을 쓰게 한 칙령)이 제정·반포됨으로써 한글의 위상이 올라가긴 했지만, 당시 유학자들이 칙령 하나로 수백 년 동안 이어온 생각을 버리고 갑자기 한글과 한자(또는 한문)를 비슷한 지위로 대우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역사 자료를 활용해 연구를 진행할 때, 혹은 단순하게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언급할 때 가장 범하기 쉬운 오류가 현대의 관점으로 과거의 사실들을 재단(裁斷)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15세기의 한글로 쓰인 '세종' '훈민정음'이 현재의 [세종], [훈민정음]처럼 소리 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15세기의 'ㅈ'과 현대의 'ㅈ'은 표기는 같지만 서로 다른 소리이기 때문이다.

다시, '옷소매 붉은 끝동'은 드라마로서의 완성도와 흥미로움을 차치하더라도, 우리 선조들이 한글을 읽고 쓰는 모습들을 매우 생동감 있게 잘 표현한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한글은 배우기 쉽고 우리말을 '그대로' 쓸 수 있는 우리 문자이기 때문에 한문 교육을 받기 어려웠던 여성들에게는 문자로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실제로 현재 남아 있는 한글 편지들도 수신자든 발신자든, 적어도 어느 한 쪽은 여성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정조가 의빈 성씨에게 남긴 제문(祭文)을 애절한 편지로 바꾼 것이야 훌륭한 드라마적 상상력이라 하겠지만, 문신이었던 홍덕로(홍국영)가 정조에게 마지막 유서를 한글 편지로 써서 남긴다는 것은 당시의 시대상을 고려하면 조금 의아할 수밖에 없는 연출이다.

물론 이 드라마에서 홍덕로의 마지막 편지는 내용 자체도 드라마에서 만든 허구의 이야기였고, 시청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한글 편지가 더 적절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그 장면에서 잠깐 보였던 편지가 한문 편지였는지 아니면 한글 편지였는지 기억조차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은 이런 사소한 것들까지 더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생각한다.

안주현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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