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의 易地思之] '화염병 시대'에 갇힌 사람들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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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3-22   |  발행일 2022-03-22 제22면   |  수정 2022-04-19 07:09
화염병 체험했던 민주화 세대
변화 외치면서 구태 습관 고수
개혁의 대의명분 주장하면서
실천방법은 '화염병 시대' 갇혀
변화의 동력인 위기감을 바탕
한층 발전된 미래로 나아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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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그놈의 뼈는 도대체 얼마나 굵길래 깎아내고 또 깎아내도 부러지지 않고 여전히 그 육중한 몸뚱이를 감당해내는지 알듯하면서도 모를 일이 아닐 수 없다."

작가 오동환이 '개나라 말 닭나라 국어'라는 책에서 한 말이다. 반성과 변화의 각오를 다질 때에 '환골탈태(換骨奪胎)'를 하겠다거나 '뼈를 깎는 각오'니 '뼈를 깎는 반성'을 하겠다는 등 별 생각 없이 이런 표현을 남용하는 경향에 대한 비판이다. 그런 표현을 한 번이라도 써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속으로 뜨끔할 게다.

변화, 정말 어렵다. 톨스토이는 "모든 사람들이 세상을 바꿀 생각을 하지만 자신을 바꾸려고 하진 않는다"고 했는데, 진리에 가까운 명언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왜 그럴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의지의 한계'가 아닌가 싶다. 변하겠다는 의지가 약하다는 뜻이 아니라, 의지만으론 바꿀 수 없는 게 너무 많다는 뜻이다.

대표적인 게 습관이다. 굳은 의지로 습관을 바꿀 수도 있겠지만, 습관 바꾸기가 실패했다고 해서 자신의 의지가 박약하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다. 오죽하면 "습관은 철사를 꼬아 만든 쇠줄과 같다. 매일 가느다란 철사를 엮다 보면 이내 끊을 수 없는 쇠줄이 된다"(호레이스 만)거나, "우리 삶이 일정한 형태를 띠는 한 우리 삶은 습관 덩어리일 뿐이다"(윌리엄 제임스)는 말까지 나왔겠는가.

개인의 습관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건 공적 영역에서 나타나는 집단적 습관이다. 4년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한 대형 은행이 '디지털 대전환'을 선언하면서 "디지털은 4차 산업혁명의 새물결이며, 변화는 선택이 아닌 숙명"이라고 외치는 선포식을 가졌다. 여기까진 아주 좋았는데, 문제는 그 선포식의 모습이 디지털 전환에 역행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슬로건을 적은 대형 현수막 아래 은행장을 중심으로 임직원 수백 명이 군인들처럼 칼 같이 열 맞춰 서서 주먹을 불끈 쥐고 팔을 뻗고 있는 사진이 한 외국 기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는 트위터에 이 사진을 리트윗하며 이런 소감을 남겼다. "한국에서 가장 큰 은행이 디지털 대전환을 호소하는데, 정작 행사는 석기시대에 온 느낌이다."

SBS 기자 네 명이 최근 출간한 '기자들 유튜브에 뛰어들다: 지상파 기자들의 뉴미디어 생존기'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도 나온다. 2년 전 '디지털 퍼스트'를 외친 국내 언론사들이 유튜브 콘텐츠 인력 채용 공고를 냈는데, 32곳 중 31곳이 비정규직 인력을 찾았다고 한다. 성과에 따라 정규직 전환을 검토하겠다니, 왜 다른 정규직 직원들에겐 하지 않았던 걸 생사의 문제가 달렸다는 '디지털 퍼스트'엔 적용할 생각을 했던 걸까? 남들이 다 외쳐대니 따라서 한 것일 뿐 '디지털 퍼스트'의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했던 건 아닐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게 은행이나 언론사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 전 분야가 추진하거나 따를 수밖에 없는 디지털혁명의 정신은 '상하좌우(上下左右) 구분이 없는 균형과 통합에 의한 혁신'(카이스트 교수 김정호)일진대, 상하좌우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의식을 그대로 두거나 오히려 강화하면서 혁신을 외치는 이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정치야말로 변화를 추구하겠다고 외치면서도 구태의연한 의식과 습관만큼은 한사코 고수하는 분야가 아닐까? 대선에서 패배한 민주당 내부에서 나오는 원인 진단의 대립 구도를 보면서 집단적 습관의 무서움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그간 민주당이 저질러 온 독선과 오만과 무능의 문제를 지적하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개혁'을 힘으로 더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한 걸 탓하는 의견도 있다. 전자의 의견이 다수인 것처럼 보이기는 하나, 확신과 열정은 후자의 의견이 더 강하다. 심지어 전자의 의견을 '배신'이라고 욕하는 사람들마저 있으니, 어이가 없다 못해 세상이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든다.

"민주화운동 세대는 경찰서를 점거하고, 보도블록을 깨고, 화염병을 던지며 군부독재에 맞섰다. 그 돌과 화염병은 낡은 시대를 보내는 굉음이자 새 시대의 신호였다." 경향신문 정치부장 구혜영이 2년 전 "박원순과 '나의 시대'를 보낸다"는 제목의 칼럼에서 한 말이다. 새 시대는 열렸고, 이제 우린 그 새 시대마저 낡았다며 더 새로운 시대의 문법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있다.

하지만 화염병의 기억은 강렬하다. 1980년대를 살면서 화염병을 지지했거나 체험했던 민주화 세대 중엔 여전히 그 기억의 연장선 상에서 오늘의 정치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이들이 많다. 화염병까지 던져야 했을 정도로 용납할 수 없었던 세력의 족보를 따지면서 특정 정당을 관용하지 않는 게 곧 정의라고 굳게 믿는다. 그들이 외치는 개혁의 대의와 명분은 때론 선진적이거니와 아름답기까지 하지만, 그 실천 방법론은 '화염병 시대'에 갇혀 있다.

대선 후 윤석열과 국민의힘을 '독재세력'으로 부르면서 "이제 다시 1987년처럼 화염병과 보도블록을 깨야만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어느 댓글을 읽으면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 웃으면 안 되는데! '화염병 시대'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1980년대의 세상을 치열하게 살았다는 걸 의미할 수 있는 것이기에 숙연해지는 게 도리가 아닌가.

그럼에도 몸은 2022년을 살고 있으면서도 의식은 80년대의 세상에 머무르고 있다는 게 안타깝다는 생각이 드는 걸 어이하랴. 슬픈 웃음이었다는 걸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생각해보시라. 우리는 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일부 선량한 시민들마저 걸핏하면 '빨갱이 타령'을 하는 걸 보지 않았던가? 그들은 정권 차원의 매카시즘에 놀아난 게 아니다. 6·25전쟁의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그들의 '빨갱이 타령'에 동의할 수 없었다면, 수십 년째 지속되고 있는 '독재 트라우마'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는 게 공정하지 않을까?

2년 전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관왕을 휩쓸자 어느 영국 언론은 "봉준호, 화염병 던지던 학생이 할리우드 스타가 됐다"고 했다. 그렇게 발전해 나가면 안 될까? 변화의 최대 동력은 위기감인데, 위기를 기존 트라우마를 강화하는 데에 써먹어도 괜찮은 걸까? 민주당이 알아서 할 일이긴 하지만, 어느 은행과 일부 언론사들이 저지른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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