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광장] 滄浪(창랑)의 물이 흐리면

  • 이재동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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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3-25   |  발행일 2022-03-25 제23면   |  수정 2022-03-25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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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동 변호사

노무현 대통령 이후 20년 가까이 민주당 지지자로 대구에서 살아왔다. 민주당을 진보라 부르고 국민의힘을 보수라 부르는 편의적이고 상대적인 분류에 따른다면 나름 진보의 편에 서 왔던 셈이다. 박정희 대통령 이후 60년간 '보수의 성지'로 불리는 곳에서 진보적인 정치적 입장을 취한다는 것은 스스로 소수의 입장에 서는 위험과 불이익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 중앙정부가 교체된 적은 있지만 우리 지방은 늘 보수를 표방하는 정당이 지배하여 왔다. 특히 환갑이 넘은 동년배의 세대들은 정치적 색깔이 대부분 비슷해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도 당연히 같은 성향을 띤 것으로 지레 생각하는 바람에 당혹스러운 경우가 많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러한 정치적 성향이 널리 알려져 불이익을 겪는 경우도 간혹 있었고, 인간적인 관계가 소원해지는 경우는 자주 있었다.

이번 대통령 선거도 지역의 진보를 자처하는 분들이 전례 없는 절박감을 가지고 노력하였지만 역시 이 동네에서 진보는 20% 내외의 소수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을 뿐이다. 보수의 아성에서 진보로 살아가는 일은 마치 어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것처럼 힘든 일이다. 성격이 모나고 잘 화합하지 못하는 별난 사람으로 취급되기 일쑤여서 그냥 다수에 투항하여 마음의 평화를 얻자는 유혹을 느끼기도 하고 더 늙으면 실제 그렇게 될 것 같기도 하다.

박근혜 대통령 시절 사람들에게 이런 요지의 이야기를 우스개로 한 적이 있었다.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소수의 아웃사이더인 우리 자신들이 즐거워야 한다. 우리가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베풀고 더 너그럽고 겸손하며 더 건전해질 때 지역사회가 변하는 것이지, 책을 많이 읽고 훌륭한 사상을 떠든다고 바뀌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집에 충실하지 못하여 가정이 평화롭지 않으면 마누라도 투표소에 가서 박근혜를 찍는다. 집식구들도 감화시키지 못하면서 밖에서 아무리 고상한 말로 떠든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옛날이야기지만 해방 직후의 정국에서 진보적인 운동이 많이 시작된 곳이어서 대구를 '동양의 모스크바'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하고,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승만에 맞선 무소속 진보 후보인 조봉암이 대구에서 무려 72.3%의 표를 얻어 개표를 지켜보던 지방경찰청장이 공포에 질려 졸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정치적 다양성이 없는 사회는 쇠락하기 마련이다. 소득수준은 전국 최하위권인 데다가 좋은 일자리도 부족하여 젊은이들이 빠져나가고 인구도 줄고 있는 도시에서 도대체 무엇을 지키려고 이렇게 보수 일변도인지 의아할 때가 많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특히 지역에서의 결과로 인해 실망감과 열패감을 느끼는 분들이 주위에 많다. 언제 우리가 주류인 적이 있었던가! 늘 소수였기 때문에 더 필요한 일이었고 자랑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슬기로운 대구 진보 생활을 위해서 이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분노나 실망이 아니라 니체적인 명랑함이 아닐까.

세상은 개개인의 바람을 외면한 채 도도히 흘러간다. 어떤 정치적 소신을 가지는 것은 세상의 변화를 도모하기보다 먼저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려 한다. 고대 초나라 시인 굴원(屈原)이 중앙정치에서 패퇴하고 낙향하였을 때 노래하였듯이,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그저 발을 씻을 따름이다.
이재동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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