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욱 큐레이터와 함께 '考古 go! go!'] 고고학으로 본 원삼국·삼국시대의 대구

  • 김대욱 영남대박물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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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6-03   |  발행일 2022-06-03 제21면   |  수정 2022-06-06 08:08
원삼국시대 대구에 소국 등장…달성토성 등 주변 읍락 합쳐 성립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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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성유적과 달성고분군 일대. <출처 대구시 중구, 2000>

원삼국시대는 한국고고학에서 사용되는 시대구분 명칭으로 초기철기시대에 뒤이은 시기를 말하는데 삼국시대의 원초적인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한반도의 북쪽에는 고구려가 국가 단계로 성장하고 있었고 남쪽에는 백제와 신라, 가야의 모태인 삼한이 있던 때다. 또한 평양 일대에는 낙랑군이 세워져 중국 문화가 한반도로 들어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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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삼국시대 영남지역 출토 청동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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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삼국시대 영남지역 출토 각종 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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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삼국시대 영남지역 출토 무기와 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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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삼국시대 영남지역 출토 토기. <국립중앙박물관·대구문화예술회관>


하지만 원삼국시대를 삼국시대 전기로 대신해 부르자는 견해도 있다. 왜나하면 이 용어는 1~3세기를 역사시대로 보아야 한다는 점, 원삼국이라는 개념이 고구려, 백제, 신라를 포함하고 있으나 실제는 고구려를 제외한 지역의 문화를 취급하고 있다는 점, 원삼국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의 내용이 학자 간에 달라 그 정의가 불분명하다는 점 등이 지적되어 왔기 때문이다.

청동기 소멸·철기 발달 시기
각각 토성 보유한 집단세력
통합 후 대구지역 소국 성립
하나의 국읍·몇 개의 읍락 구성
신라시대 대구의 군현과 같아


원삼국시대는 종래 고고학에서 김해시대 또는 웅천기 등으로 불려왔고, 역사학에서의 삼한시대, 부족국가시대, 성읍국가 등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실제 연대는 기원전 100여 년부터 기원후 300년까지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고고학의 편년은 새로운 자료의 출현과 해석, 그리고 과학의 발달에 따라 보다 정밀하게 설정될 수 있는 만큼 원삼국시대라는 용어와 그 시기를 못 박아 둘 필요는 없으며 연구지역 또는 연구대상이 겪은 사회·문화변동에 따라 그 시기 설정을 탄력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원삼국시대의 문화적 특징은 청동기의 소멸과 철기의 발달 및 보급, 철제 농구와 소에 의한 농사의 발전, 그리고 저화도의 무문토기가 아니라 높은 온도의 단단한 회색 김해식 토기의 생산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변화는 낙랑군을 통한 중국 한(漢)문화의 자극에 의한 것이며, 특히 낙동강 유역은 철을 생산해 낙랑과 일본 등에 수출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대의 유적으로는 집자리, 조개무지, 가마 등 생활유적이 있고, 무덤에는 나무널무덤(木棺墓)과 나무덧널무덤(木槨墓), 돌덧널무덤(石槨墓), 독널무덤(甕棺墓) 등이 있다. 유물에는 김해식 토기, 철기, 골각기, 장신구 등이 있다.

이러한 문화를 기반으로 한반도 남부지방에서는 기원전 100년 무렵부터 여러 개의 소국이 등장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3세기 후반대의 사정을 전하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한반도 남부에 마한, 진한, 변한이 존재하는데 마한은 54개의 소국으로, 진한과 변한은 각각 12개의 소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당시 대구지역에도 진한의 한 소국이 성립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기원전 1세기경 대구지역의 고고학적 현상을 살피면 청동기와 철기의 부장이 크게 늘어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예컨대 세형동검을 비롯한 각종 청동기와 철기가 신천동, 평리동, 만촌동, 지산동 등지에서 출토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유물상의 변화는 기원전 1세기 무렵 대구지역에 지석묘 축조 단계와는 차이가 있는 유력자가 출현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들 유력자가 이끄는 단위집단을 중심으로 보다 진전된 형태의 정치세력이 형성되고 있었음을 말한다. 이러한 정치적 유력자가 중심이 된 단위 정치세력들이 통합되면서 대구지역에도 소국이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의 대구 모습은 지역에 남아있는 고분군과 토성을 통해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하다. 즉 대구지역에는 달성동의 달성토성(현재의 달성공원), 봉덕동의 용두토성, 금호강변 복현동의 검단토성, 봉무동의 봉무토성 등이 남아있다. 이들은 인접한 지역의 고분군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다시 말해 달성토성은 달성고분군과, 용두토성은 대명동고분군과, 봉무토성은 봉무동고분군과 인접해 있다. 이는 고분군에 묻힌 피장자들이 각각 토성을 보유한 세력 집단이었으며 이들이 통합되어 대구지역에 소국이 성립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시기 대구지역의 사회 내부구조는 어떠하였을까? 삼한소국의 구조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하나의 소국은 원래 몇 개의 읍락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읍락 연맹이었으며, 읍락 가운데 가장 우세한 읍락이 국읍으로서 소국의 중심지적 위상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를 참조해서 보면 대구지역의 소국 역시 하나의 국읍과 몇 개의 읍락으로 이루어져 있었을 것이다. 이를 방증하는 것이 후일 신라가 대구지역에 설치했던 군현의 구조이다. 일반적으로 신라왕조는 복속한 소국을 군으로, 예하의 읍락은 성촌으로 체제를 조직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대구지역의 고고학적 연구 성과와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현재까지 대구에서 확인된 고고학 유적의 분포를 살펴보면 대구지역의 대구현은 본래 달구화현으로 달성토성과 달성고분군으로, 팔리현은 본래 팔거리현으로 팔거산성과 구암동고분군으로, 하빈현은 본래 다사지현으로 죽곡리산성과 죽곡리고분군, 문양리·문산리고분군 등으로, 화원현은 본래 설화현으로 설화와 화원 성산동고분군, 화원토성 등으로 연결될 수 있다. 이들 중 규모나 수량 부장품의 내용 등에서 중심 집단은 달성고분군을 축조한 세력 즉 비산동·내당동 일대에 거주했던 세력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 세력을 중심으로 팔거리, 다사지, 설화 등을 그 소속 집단으로 하는 정치세력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영남대박물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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