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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완 (논설위원) |
2016년 최순실 비선 논란이 불거졌을 때 박근혜 대통령 측에선 "최순실은 '키친 캐비닛'"이라고 강변했다. '비공식 자문단' 정도로 해석되는 키친 캐비닛은 미국 앤드루 잭슨 대통령(1829~1837년 재임) 때 등장한 용어다. 잭슨 대통령은 당시 부통령과 국무장관 간의 갈등으로 내각이 무능해지자 지인들의 자문과 도움을 받았다. 언론이 이를 '키친 캐비닛'으로 명명했다. 그러나 잭슨의 키친 캐비닛은 사회적으로 명망 높은 당대 공인들이었다. 최순실처럼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고 비선도 아니었다. 최순실이 키친 캐비닛? 황당한 궤변이다.
2016년 6월 정부는 영남권 신공항 건설을 백지화하고 김해공항을 확장 카드로 선택했다. 하지만 대선 공약 파기란 비난이 쏟아지자 김해공항 확장이 김해신공항으로 둔갑했다. 처음 정부 발표 땐 '신공항 백지화, 김해공항 확장'이랬는데 두 시간 만에 '김해공항 신공항급 확장'으로 바뀌었고, 급기야 '김해신공항'으로 못 박았다. 한 편의 블랙 코미디였다. 당시 강호인 국토교통부 장관은 "관제탑을 새로 건설하니 신공항이 맞다"고 부연했다. 역대급 궤변이다.
국어사전에 궤변은 '상대편의 사고(思考)를 혼란시키거나 감정을 격앙시켜 거짓을 참인 양 꾸며 대는 논법'이라고 적시돼 있다. 궤변은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에서 유래한다. 소피스트(sophist)는 '지혜로운 자'를 뜻하는 그리스어가 어원이다. 소피스트의 함의(含意)대로 고대 그리스에서 궤변은 묵직한 담론을 설파하는 논법 또는 설득술로 각인됐다. 하지만 현세의 궤변은 사전에서 풀이한 것처럼 부정적 의미로 쓰인다.
배현진 국민의힘 최고위원이 윤석열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이 문재인 정부의 부채 폭탄 고지서 때문이라고 말했다. 여론조사에서 노정됐듯 윤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은 편향 인사와 사적 채용, 일방적 국정 운영, 경험 부족과 자질, 경제·민생 소홀 등이 원인이다. 권성동 대표 대행의 거친 언행, '이준석 팽(烹)'도 영향을 미쳤을 터다. 한데 지지율 하락마저 문 정부 탓으로 돌리다니. 남 탓의 종결자이자 지록위마급 궤변이다.
윤석열 정부의 찌질한 관행은 걸핏하면 문재인 정부와 비교하거나 문 정부를 탓하는 것이다. 예컨대 검찰 편중 인사를 지적하면 "문 정부에선 민변 출신이 도배하지 않았느냐"는 식이다. 문재인 정부가 무능했던 건 맞다. 평점을 주자면 D학점을 넘기 어렵다. 하지만 문 정부가 유능했다면 과연 윤석열 정부의 탄생이 가능했을까. 오로지 높은 정권교체지수로 당선된 윤 대통령 아닌가. 게다가 미디어토마토 여론조사에선 윤 정부가 문 정부보다 '더 못한다'는 평가까지 나왔다. 문 정부보다 못하다면 F학점?
이상민 행안부 장관은 "경찰국이 신설되면 경찰이 청와대의 직접 통제를 받지 않고 행안부 장관을 통해 지휘·감독을 받게 되면서 오히려 예측 가능하고 합리적인 견제와 관리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왜 경찰서장들까지 나서 "역사적 퇴행"이라며 반발할까. 논점을 흐리는 야릇한 궤변이다. 이상민 장관은 또 경찰서장 회의를 12·12 쿠데타에 비유했다. 경찰 중립을 촉구하는 모임이 군사반란? 막가파식 궤변이다. '친위 장관'다운 클리셰다.
언론 비판이나 상대 진영 공격에 대한 방어기제론으로 궤변만 한 게 없다. 하지만 궤변으로 포장한들 불공정이나 무리한 정책 입안이 정당화되진 않는다. 그런데도 정치판은 궤변에 포박된 양 유체이탈의 언설이 난무한다. 국민을 기망하는 군색한 변명보다 군자표변(君子豹變)의 의미를 새겨야 하지 않을까.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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