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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희 (법무법인 율촌 고문·전 대한변호사협회장) |
큰아들과 단둘이 떠난 여름 휴가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재수하는 작은아들 때문에 올해도 가족여행은 힘들겠구나라고 생각하던 차에 아내가 제안했다.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는지 아느냐. 바쁘다는 핑계로 지금까지 아이들과 깊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느냐. 가슴 뜨끔한 말들을 한참이나 쏟아내더니 선심 쓰듯이 둘만의 여행을 권유하였다.
사실 20년 만에 처음으로 오롯이 1주일간의 장기휴가를 계획하고 있었다. 변협회장을 지낸 홍복으로 전국 어디를 가도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를 외치며 반갑게 하루 저녁 술 한잔 받아줄 지인들이 있다. 재수생 아들의 본의 아닌 효도 덕분에 혼자서 전국을 주유하려던 핑크빛 꿈에 찬물을 끼얹는 제안이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스무 살도 훌쩍 넘겨버린 큰아들과 단둘이 여행한 기억이 없었다.
2박3일간 '고군산군도'로 여행 가기로 했다. 고군산군도는 군산지원에 재판하러 다닐 때 현지 변호사들로부터 수없이 추천받아 꼭 가보고 싶었던 곳으로, 신선이 노닐었다는 선유도를 비롯한 16개의 유인도와 47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몇 개의 섬은 다리로 연결되어 접근이 편리하고,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멋진 풍광으로 유명하다.
고군산군도의 절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대장봉까지 다리로 연결된 데다가 여행의 주목적이 아들과의 대화인지라 차를 운전하여 갔는데 이 또한 탁월한 선택이었다. 대장봉과 선유봉을 오르면서, 옥돌과 몽돌 해변을 거닐면서 또한 피서철 막힌 차 안에서 나눈 오랜만의, 어쩌면 처음인 진솔한 대화로 인하여 우리 부자의 마음이 부자만큼 풍요로워졌다.
어리게만 보았던 아들의 성큼 커버린 어른스러움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변호사 아빠 만나 호강하며 사는 줄로만 알았는데 나름 치열하게 자신과 시대의 고민을 하는 청년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불안한 진로, 적지 않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배운 냉정한 사회 현실 등 2030세대의 고민을 들으면서 다시 한번 소통의 중요함을 느꼈다.
요즘 드라마보다 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대통령과 여당 대표의 갈등 역시 소통의 부족 때문이 아닐까 싶다. 평생 자신 앞에서 감히 반항하기 어려운 2030세대 검사들만 만나며 살아온 대통령과 좋은 머리에다가 현란한 언변으로 무장하였지만 5060세대가 보기에는 한없이 오만해 보이는 '키보드 워리어'인 여당 대표의 극한 대결이 드라마처럼 마냥 흥미롭지만은 않다.
갈등으로 치닫다가 정치적 셈법에 따라 짧은 시간 술잔을 건네며 어깨동무나 하는 보여주기식 소통은 의미가 없다. 이번에 경험해보니 한적한 섬 같은 곳이 진솔한 대화를 나누기에 적합한 듯하다. 가보지 못 했지만 거제의 저도에 대통령 휴양지가 있다는데, 아버지와 아들뻘쯤 되는 대통령과 여당 대표가 함께 가서 소통하며 며칠 휴가를 보낸다고 욕할 국민은 없다.
날씨도 더운데 정치판 이야기로 더욱 열불 나 있을 영남일보 독자 여러분의 머리를 식혀줄 여행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호남으로의 여행이다. 코로나로 아직 해외여행이 불안한 지금, 차로 불과 몇 시간 거리에 멋진 풍경과 맛, 그리고 낯설지만 정겨운 사투리와 색다른 문화가 어우러진 새로운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여러분이 경상도 사투리를 쓰며 '군산 시간여행거리'를 걷고 있는 동안 전라도 사투리로 '대구 근대문화골목'이 가득 채워지는 상상만으로도 이 여름이 시원해질 듯하지만, 진정 더욱 행복해지고 싶다면 당장 떠나보시라.
이찬희 <법무법인 율촌 고문, 전 대한변호사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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