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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순섭 (국립대구박물 관장) |
너무 당연한 지식이었던 게 한순간 아닐 수 있다면 당혹스럽다. 금관도 이런 사례의 하나이다. 우리가 읽은 문화유산 설명에서 금관이라 지칭한 장신구는 과연 일상에서 착용자의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관복의 한 부분이자 모자 용도의 관(冠)으로서 유일한 것일까?
솟구친 꾸미개가 돋보이는 머리띠 기반의 고대 장신구를 우리는 관이라 배웠다. 그 이유는 1920년대 경주의 신라능묘에서 이 장신구가 피장자의 머리 부위에서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한반도뿐만 아니라 일본열도에서도 확인된 머리띠 기반의 장신구를 초기 일본 고고학자들은 고대 관의 전형이라 특정하였다. 1970년대 발굴한 신라능묘에서도 같은 양상이 확인되었기에 이를 의심하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삼국시대 관복을 설명하는 역사 기록과 당시 생활상을 표현한 고분벽화 및 토우는 그간 고고학 성과와 어긋난 사실을 알려준다. 관복에는 나라마다 상징하는 표지를 붙인 관을 착용했다. 그 표지는 고구려의 깃털과 백제의 꽃이 대표적인데, 발굴된 실물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다만 이 관은 머리띠를 기반으로 한 게 아니라 상투를 가리는 작은 고깔에 깃털이나 꽃을 귀금속 장식으로 만들어 끼우거나 붙인 형태이다. 신라의 인물 토우에 표현된 관도 고깔이다.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고대국가에서 보편적으로 쓰인 관은 오직 고깔뿐이다.
기록과 고고 자료의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두 종류는 모두 고대의 관인 건 분명하다. 그래서 머리띠 기반의 관을 대관(帶冠), 고깔 기반의 관을 모관(帽冠)이라 이름 붙였다. 대관은 압도적으로 신라에 많고, 일본열도에 제법 있으며, 가야 전역과 백제의 변두리에서 조금씩 확인된다. 고구려 전역과 백제의 중심부에서는 발굴된 게 없다. 신라의 사례로 볼 때 대관은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소유한 게 분명하며, 모관은 왕족을 제외하면 대체로 성인 남성에 한정되는 듯한데 삼국시대 관복의 설명에 가장 충실한 관이다. 이 두 종류의 관은 분포와 소유 양상에서 뚜렷하게 차이를 보인다.
부장품으로만 발굴되는 대관과 부장뿐만 아니라 생활상 전반의 기록에서 확인 가능한 모관 가운데 무엇이 훨씬 더 관의 조건에 충분한지 이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대관이 장의용품 전용이라든지 데스마스크였다는 견해를 따르는 건 결코 아니다. 본질은 다른 곳에 있는데 다음에 풀어보고자 한다.
국립대구박물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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