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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이 쓴 '사기(史記)'는 총 130편으로 구성된 방대한 기록이다. 사서(史書)의 성경으로 불릴 만큼 압도적 평가를 받는다. 중국 상고시대 오제(五帝)부터 한무제까지의 2천년 통사(通史)가 켜켜이 축적돼있다. 문장은 유려하고 생동감 넘치며 행간마다 사마천의 통찰력과 탁견이 번득인다. 52명의 화식가(부자)를 다룬 129편 화식열전(貨殖列傳)을 중국인들은 상경(商經)이라고 한다. 상업의 경전이란 뜻이다.
화식열전에 의미 있는 대목이 나온다. '제일 잘하는 정치는 국민의 마음을 따라가는 정치, 그다음이 국민을 이익으로 이끄는 정치, 최악의 정치는 국민과 다투는 정치다.' '사기'를 봤던 걸까. 윤석열 정부 인수위 사무실엔 '국민의 뜻을 받들겠습니다'라는 백드롭이 선명했다. 당시 윤석열 당선인이 직접 쓴 글씨체를 그대로 옮겼다. '국민의 마음을 따라가는 정치'를 하겠다는 의지가 공고해 보였다. 그런데 웬걸. 대통령 취임 후 석 달여의 행보는 외려 '국민과 다투는 정치'에 가까웠다.
박순애 전 교육부 장관이 다투는 정치의 본보기를 시전했다. 박 전 장관은 애당초 교육부 수장 자격이 없었다. 만취운전 하나만으로도 진작 아웃됐어야 했다. 법원의 선고유예를 받은 내막도 석연찮다. 만취운전의 선고유예 확률은 1%도 되지 않는다는데 어떤 신공(神功)을 동원했는지 궁금하다. 거기다 논문표절, 아들의 고액 컨설팅까지. 온갖 하자(瑕疵)에 포획된 인물이다.
만 5세 입학은 2007년 국책연구소 설문에서 국민 10명 중 7명이 반대했다. 강득구 민주당 의원실이 지난 1~3일 실시한 온라인 조사에선 반대 응답이 98%였다. 전 국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거시교육정책을 갓 취임한 장관이 로드맵까지 밝히다니. 여론 수렴 과정도 없이. 5세 취학이 경제활동인구와 노동기간을 늘린다고? 그러려면 차라리 OECD 최고 수준인 대학 진학률부터 낮춰라.
박 전 장관은 취학 연령을 1개월씩 앞당겨 12년간 추진하겠다는 방안도 거론했다. 탁상공론의 화룡점정이다. '봉숭아 학당'을 만들겠다는 건가. 우리는 무자격·무능 장관의 허접한 실체를 똑똑히 목도했다. 박 장관의 사퇴로 5세 취학은 사실상 백지화됐지만 박순애 파동은 곳곳에 생채기를 남겼다. 교육부 업무 보고 때 "신속히 강구하라"고 지시했던 윤석열 대통령도 스타일만 구겼다.
행안부 경찰국 신설도 국민여론에 반한다. 한국갤럽조사에서 '경찰국 신설이 경찰조직을 통제하려는 정부의 과도한 조치'라는 응답이 51%, '경찰권 남용을 견제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라고 한 국민은 33%였다. 경찰서장 회의에 대해서도 '정당한 의사표명' 응답이 59%인데 비해 '부적절한 집단행동'은 26%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행안부는 시행령 입법 예고기간을 40일에서 4일로 단축하면서까지 경찰국 설치를 밀어붙였다.
조선시대엔 조정이 잘못된 정책을 펴면 만인소(萬人疏)를 올려 간청했다. 윤석열 정부의 국정 기조는 '사기(史記)'의 간언대로 국민의 마음을 따라가는 모양새는 아닌 듯하다. 국민여론에 맞서려는 추임새가 자주 감지된다. '디지털 만인소'라도 올려야 하나.
윤 대통령은 휴가에서 복귀하면서 "초심으로 국민의 뜻을 받들겠다"고 말했다. 인수위의 백드롭을 다시 읊은 것이다. 한데 국민을 받드는 건 '말'로 하는 게 아니다. 경찰국 신설 철회, '윤핵관' 이선 후퇴, 인적 쇄신 같은 '행동'이 따라야 한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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