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중심에 선 예천人 .1] 하늘이 내린 효자 도시복...숯 구워 팔아 지극히 부모 봉양…솔개·호랑이도 효심 감복해 도와

  • 김진규 소설가·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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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10-17 07:19  |  수정 2022-10-19 14:07  |  발행일 2022-10-17 제11면
상리면 야항리서 도상진 장남으로 출생…관직에 뜻 없이 서민의 삶에 충실
부모 진지상 늦어질까 걱정하자 고기 보따리를 낚아채 집에 놓고 간 솔개
병중에 드시고 싶어하던 홍시 찾아 먼길 나설때 등을 내어 실어다준 호랑이
얼음구멍서 갑자기 튀어나온 잉어 등 기적적 효행 사례 '명심보감'에 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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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도 감복했다는 도시복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예천군 효자면의 도시복 효공원에는 그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으며, 집 앞에 도시복의 형상물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맞고 있다.

■ 시리즈를 시작하며…

경북 예천은 천혜의 자연과 함께 유서 깊은 역사가 공존하는 고장이다. 특히 역사의 중심에 선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인재향(人材鄕)으로 손꼽힌다. 영남일보는 예천이 낳은 인재와 그들의 이야기를 재조명하는 '역사의 중심에 선 예천人'시리즈를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이어간다. 올해는 효자 도시복, 우리나라 가전체 소설의 효시 국순전의 저자 임춘, 불사이군의 충신 김저, 예천지역민을 위해 의술을 펼친 이찬과 김영인 부부, 고국을 생각하며 원나라 황제에게 고려의 세금을 깎아달라 청했던 국파 전원발 등을 연재한다. 1편에서는 하늘도 감복시켰다는 효자 도시복에 대해 다룬다.


#숯 굽는 사내

1883년(고종 20) 9월23일(양력 10월23일), 의정부에서 임금에게 아뢰었다.

"경상좌도 암행어사 이도재(李道宰)의 별단(別單·암행어사의 보고서에 딸린 첨부 문서)에 속한 내용입니다. '야계(也溪) 도시복(都始復)의 성실함과 효성이 드러났으니 마땅히 아름답게 여겨 포상하소서'라 하였으니 이를 해당 부처에 일러 처리하게끔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에 임금이 윤허하였다. 도시복(1817~1891)이 죽기 8년 전의 일이었다.

도시복은 1817년, 예천군 상리면 야항리(현 효자면 용두리)에서 도상진(都尙震)과 강릉유씨(江陵劉氏) 사이의 5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직계 조상 가운데 벼슬을 산 이가 많았으나 도시복은 관직과는 상관없는 서민의 삶을 살았다. 서민의 삶이 의미하는 바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도시복의 것은 가난함이었다. 척박한 땅을 일구는 것만으로는 식구들이 배불리 먹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부모님을 편히 모시기 어려웠다. 도시복은 호구지책으로 숯을 굽기 시작했다.

그것은 중노동이었다. 참나무를 구해 바리바리 짊어지고 가마로 옮기는 것부터가 일이었다. 널브러진 나무를 일정한 크기로 잘라 아궁이에 넣고 불을 지핀 뒤 옆을 지키다 보면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도시복이 흘리는 땀의 양만큼 흑탄과 백탄이 골고루 만들어져 나왔다. 도시복은 그렇게 구워진 숯을 내다 팔아 집안을 이끌었다. 맏아들이자 맏형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 믿고 최선을 다했다.

분주한 와중에도 도시복은 부모님에 대한 '출필곡반필면(出必告反必面)'의 도리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집을 나설 때 반드시 아뢰고, 돌아와서도 반드시 얼굴을 보고 인사를 드림으로써 양친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늘이 도우셨음인지 아내 곡산연씨(谷山延氏) 또한 비슷한 성정이었다. 부부간에 평화가 흘렀고, 그 평화가 집 안을 훈훈하게 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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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복 효공원에는 도시복의 효와 관련된 각종 이야기에 등장하는 호랑이와 잉어 등이 테마로 재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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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복의 효행을 기록한 '효자야계도공정려비'.


#하늘이 내린 효자

어느 날이었다. 예천 장날을 맞이해 도시복은 여느 때처럼 지게에 숯을 싣고 장터로 향했다.

"요즘 어머니 건강이 전만 같지 않으시니 걱정이다. 잘 드셔야 하는데 몇 술 뜨시다 수저를 내려놓으시니 이를 어이할꼬. 고기를 지금보다 많이 드시면 회복하시는 데 도움이 되려나. 오늘은 한 근 더 사야겠구나."

고단한 장사 끝에 도시복은 숯을 모두 팔았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늦어져 해가 서쪽하늘로 넘어가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진 도시복은 숯을 판 돈으로 서둘러 고기와 반찬거리를 사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갑자기 솔개가 나타나 보따리를 채 날아갔다. 어찌나 놀랐는지 헛웃음이 다 터졌다. 그 자리에 서서 넋 놓고 있던 도시복이 심호흡을 했다.

"이리 된 데는 하늘의 뜻이 있을 것이다."

의연함을 찾은 도시복이 다시 걸음을 놓았다. 더 늦었다가는 부모님이 걱정하실 게 뻔해 부지런히 움직여 집에 닿으니 아내가 저녁상을 차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궁이 옆에 솔개가 채간 보따리가 놓여 있었다.

아연해진 도시복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며 어찌 된 일인지를 묻자 아내가 "아버님, 어머님 진지 드실 시간이 늦어질까 봐 솔개가 서방님을 도왔나 봅니다"고 답했다. 그리고 "부모님을 생각하시는 서방님의 진심이 짐승들 사이에도 파다하게 소문이 난 게지요"라고 덧붙였다.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싶으면서도 도시복은 안도의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지극한 효심을 하늘도 아는지 신기한 일이 한 번씩 벌어졌다. 부모님이 병중에 흘리신 말씀을 놓치지 않고 동분서주한 끝에 5월에 홍시를, 섣달에 수박을 구한 것이 그것이다. 심지어 홍시를 얻은 곳은 예천에서 이만저만 멀지 않은 산골짜기 마을이었다. 그 먼 길을 호랑이가 실어가고 실어왔다. 당시 호랑이가 감나무 사이를 정신없이 헤매던 도시복에게 감복해 등을 내준 장소를 '업은골'이라 일렀는데, 현재 은풍면 송월리에 자리하고 있다.

또 병환 중인 부모님을 노심초사하는 중에 얼음구덩이에서 잉어가 튀어나오기도 했으며 노루가 집 안으로 뛰어 들어오기도 했다. 잡아서 부모님을 구완했음은 물론이다. 서리가 일찍 내려 마을의 농작물이 해를 입은 해에도, 돌덩이 같은 우박이 퍼부어 천지가 엉망이 됐던 해에도 도시복의 산골 밭만 무사히 넘어갔다. 이때 도시복은 욕심을 부리지 않고 소출을 갈라 이웃과 나누어 먹었다. 이처럼 상서로운 일들이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벌어지자 마을에서 관아에 효자 발천(發闡)의 소장을 올렸다.

#명심보감에 기록되다

지극정성으로 부모님을 봉양했어도 흐르는 시간까지 붙들어 매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도시복은 결국 부모님을 여의었고 애끓는 심정으로 무덤가에서 시묘를 살기 시작했다. 그런데 낭패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근방에 물을 구할 곳이 없었다. 자신도 자신이지만 그래서야 부모님 묘에 상식을 올리기가 어려웠다. 이를 어쩌나 궁리하는데 맑은 물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반색하며 뒤지니 근처 바위 아래서 맑은 물이 솟고 있었다.

"천지신명이시여, 감사합니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았던 그 물줄기는 도시복이 시묘를 마치고 떠나자 이내 말라버렸다.

이처럼 이적을 몰고 다니던 도시복의 지극한 효행은 '명심보감(明心寶鑑)'에 남아 있다. 8장 '효행 속(孝行 續)'에 어머니를 위해 자식을 버리려 했던 손순(孫順), 흉년과 전염병의 때에 자신의 넓적다리살을 베어 부모님을 봉양한 상덕(向德)과 함께 도시복이 실린 것이다.

이야기는 "都氏家貧至孝, 賣炭買肉, 無闕母饌. 一日, 於市晩而忙歸, 鳶忽攫肉. 都悲號至家, 鳶旣投肉於庭"으로 시작한다. 이를 풀이하면 "도씨는 집은 가난하였으나 효성이 지극하였다. 숯을 팔아 고기를 사서 어머니의 반찬을 빠짐없이 차렸다. 하루는 장에서 늦어 걸음을 재촉하는데 솔개가 고기를 낚아채 가버렸다. 슬피 울며 집에 와 보니 솔개가 그 고기를 집안 뜰에 던져 놓았다"라는 뜻이다. 이야기는 또 다른 내용으로 이어진다.

"(…) 都彷徨枾林, 不覺日昏. (…) 都乘至百餘里山村, 訪人家投宿. 俄而主人, 饋祭飯而有紅枾. (…) 是天感君孝. 遺以二十顆. 都謝, 出門外, 虎尙俟伏. 乘至家, 曉鷄 .

(…) 도씨는 감나무밭을 헤매느라 날이 저문 것도 몰랐다. (…) 호랑이 등에 올라 백 여리나 되는 산동네에 이르러 하루 묵게 되었다. 주인이 제사상의 찬으로 밥상을 차려주었는데 홍시가 있었다. (…) 하늘이 그대의 효행에 감복하셨나 봅니다 하며 주인이 홍시 스무 개를 주었다. 감사 인사를 전하고 나오니 호랑이가 여전히 엎드려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타고 집에 돌아오자 새벽닭이 울었다."

그리고 "後母以天命終, 都有血淚" 즉 "후에 어머니가 천명을 다하고 돌아가시자 도씨가 피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였다"로 끝이 난다.

아울러 그의 효행은 마을의 이름마저도 바꾸게 만들었다. 본디 상리면(上里面)이었으나 2016년 2월1일에 효자면(孝子面)으로 명칭이 달라진 것이다. 그리고 그 효자면에 그를 기리는 도시복 효공원이 세워졌다. 총면적 5천992㎡ 규모로 조성된 공원에는 도시복의 생가가 복원돼 있고, 효자각 1개소, 사모정 3개소, 홍살문 등이 설치되어 있다. 아울러 도시복의 이적에 얽힌 솔개·홍시·수박·잉어 이야기 또한 테마로 재현돼 있다. 그리고 그 전부를 호랑이 동상이 형형한 눈빛으로 지키고 있다.

글=김진규<소설가·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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