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중심에 선 예천人 .2] 애민정신 실천한 예천임씨 시조 임춘…고려 무신란때 집안 몰락…예천 머물며 벼랑길 내고 물길 만들어

  • 김진규 소설가·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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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10-24 07:38  |  수정 2022-10-24 08:38  |  발행일 2022-10-24 제17면
정변에 아버지·큰아버지 잃고 떠돌아
지과리 터잡고 고통을 문학으로 승화
가전체 소설 효시 국순전·공방전 남겨
'서하선생집' 1656년 운문사서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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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춘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예천 옥천서원. 임춘은 고려시대 무신의 난으로 집안이 풍비박산 나는 아픔을 겪었으나 예천에서 지역민들을 위한 일을 함으로써 예천임씨 시조로 추앙받는다. 임춘의 유고를 모아 고려시대에 만든 '서하선생집(西河先生集)'의 판본이 400여 년이 흐른 뒤 조선시대에 청도 운문사 동호(보물 제208호)안에서 발견됐다. <작은 사진·출처 문화재청>

임춘은 고려시대 무신의 난에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목숨을 잃고 가문이 풍비박산 나는 고통을 당해 이리저리 떠돌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예천에 머물면서 지역민들을 위한 애향심을 발휘해 '임춘천'을 내기도 했다. 이런 예천에 대한 사랑은 그를 예천임씨 시조로 만들었다. 또한 임춘은 자신의 불우했던 인생에 지지 않고 사회비판의식을 담은 가전체 소설을 저술해 이름을 후세에 남겼다.

#칼끝이 목을 겨누다

1170년 고려 의종의 치하였다. 문신과 무신의 갈등이 극에 달했다. 문신은 왕권을 등에 업고 정치를 좌지우지한 반면, 무신은 같은 관리임에도 호위무사 정도로나 취급받았던 것이다. 결국 정중부(鄭仲夫)가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이른바 무신정변이었다. 의종은 거제도로 쫓겨 갔고 도성에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문신이라면 지위 고하를 가리지 말고 잡아 죽여라."

서하(西河) 임춘(林椿·생몰년 미상)의 집안에도 화가 닥쳤다.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운 임씨 가문은 당시 귀족사회에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기반이 탄탄한 명문가에 속했다. 증조부 임언(林彦)은 예종 때 병마령할(兵馬鈴轄)로 여진정벌에 큰 공을 세워 '고려사(高麗史)'에 이름을 올렸고, 조부 임중간(林仲幹)도 중서문하성의 정이품직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아버지 임광비(林光庇)와 큰아버지 임종비(林宗庇) 형제 또한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갔을 정도로 칭송을 받았다.

임춘 본인도 그에 못지않았다. 7세에 육십갑자를 외우고 경서를 통달해 신동으로 불렸고 사마시(司馬試·소과)에도 단번에 급제했다. 반면 대과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당시는 과거제가 시행된 이래로 급제가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어쩔 수 없이 연소자의 합격을 암암리에 억제했는데 임춘이 스무 살도 안 된 나이로 응시한 탓이었다. 그 과정에서 문음(門蔭)을 제안받기도 했다. 전현직 고관의 자제를 과거 없이 관리로 채용하는 제도였기 때문에 고개만 끄덕이면 되는 일이었지만 임춘은 "내 어찌 조상님의 음덕에 기대 벼슬을 구하겠는가. 수치스럽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당연히 정변을 일으킨 무신 집단의 눈 밖에 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살해되고 집이 불탔다. 장서가 잿더미로 내려앉았음은 물론이었다. 조상 대대로 지켜온 공음전(功蔭田·공신과 5품 이상의 관리에게 지급하던 토지)을 빼앗기면서 당장 끼니까지 걱정해야 했다. 가문의 처참한 몰락이었다.

급기야 목숨마저 경각에 이르자 임춘은 가족과 함께 은신했다. 모멸스러움을 우정에 의지해 버텼다. 임춘을 비롯해 이인로(李仁老)·오세재(吳世才)·조통(趙通)·황보항(皇甫沆)·함순(咸淳)·이담지(李湛之) 등 일곱 명이 모였다 하여 죽림칠현에 빗댄 죽림고회(竹林高會)였다. 하지만 희망을 품을 새도 없이 상황은 더 악화됐다. 김보당(金甫當)이 난을 일으키면서 수색과 탄압이 더 지독해진 것이다. 임춘은 개경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급제와 출사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는구나."

1174년(명종 4), 울분 속에 짐을 꾸려 길을 떠났다. 목적지는 강남이었다.

#그를 위로한 땅, 예천

험난한 여정 끝에 임춘이 자리를 잡은 곳은 예천 지과리(知過里)였다. 이곳에 은거하여 집을 지었으며 그 집을 희문당(喜聞堂)이라고 했다. 땅은 푸근했으나 궁핍함은 여전히 그를 괴롭혔다.

詩人自古以詩窮/顧我爲詩亦未工/何事年來窮到骨/長飢却似杜陵翁.

'자고로 시인은 시 때문에 곤궁하다지만/돌아보면 나는 시조차도 세련되지 못하구나/어찌하여 곤궁함은 해마다 뼈에까지 사무치는지/오랜 굶주림이 두릉옹과 흡사하구나.'

두릉옹은 전란을 피해 떠돌이 생활을 하며 우국(憂國)의 심정을 읊었던 두보(杜甫)를 일렀다. 임춘의 처지에서 감정이입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임춘은 예천 지역주민들에게 애향심과 애민심을 발휘하여 노동도 불사했다. 예천읍 서본리 굴모롱이 위의 현산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암반길(지고개 입구에서 천주교 성당 아래)은 옛날부터 사람들이 다니던 벼랑길인데, 임춘이 암반을 깎아서 비리길을 내어 사람들이 편리하게 다니게 하였다. 이곳을 사람들은 '임춘천' 곧 임춘벼랑길이라 불렀다. 또한 임춘은 벼랑길을 내면서 한천과 연결되는 도랑을 파서 남쪽 교외에 있는 솔개들에 물을 대어 농사에 도움을 주었다. 이후 1919년 장승환 면장 때 예천읍내 하수와 우수를 순조롭게 내려가게 하기 위해 삼익수도(三益隧道)를 개통하였다. 임춘이 굴을 뚫어 물길을 내고, 이것을 확장해 삼익수도로 불리었다는 것은 후대로 내려오면서 이런 사실들이 뒤얽혔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처럼 예천에 대한 임춘의 지극한 애정은 그를 예천임씨의 시조로 이끌었다.

그 전부가 임춘이 절조를 지킬 수 있는 힘으로 작용했다. 달팽이 집과 다를 바 없는 누옥에서 밥 대신 벼루를 깨어 먹는 심정으로 과거시험에 더 집중한 것이다. 하지만 중앙에는 그를 불러들일 의사가 눈곱만큼도 없었다. 임춘은 "큰 고래 떨치려니 파도가 마르고, 아픈 학 날려 하니 날개가 꺾였구나!"하고 탄식했다. 그리고 고통으로 끓는 속을 문학을 통해 표출했다.

十年流落負生涯/觸處那堪感物華/秋月春風詩准備/旅愁羈思酒消磨/縱無功業傳千古/還有文章自一家.

'십 년을 떠도는 동안 생계가 무너졌으니/어디를 가도 경치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구나/가을 달, 봄바람에 시를 준비하고/나그네 시름과 유랑의 회포를 술로 지우나니/천고에 전할 공은 없다 해도/문장만큼은 일가를 이루었도다.'

그러던 1179년(명종 9)의 어느 날, 정변의 주동 인물이었던 정중부가 죽었다. 정권은 여전히 부패한 무인의 손에 있었으나 임춘은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예천에 정이 많이 들었지만 임춘은 개경행을 결정했다. 그때가 늦봄에서 초여름 사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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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춘이 예천 서본리에 한천과 연결되는 도랑을 파서 농사를 도왔다. 1919년 이곳에 삼익수도(三益隧道)가 개통되었다. 현재 수도는 사용하지 않지만 그 흔적과 삼익수도라 새긴 글자가 벽에 남아 있다.

#인재는 죽어 이름을 남기나니

만사형통을 기대한 것은 아니나 거의 10년 만에 돌아온 개경은 예상했던 이상으로 삭막하기만 했다. 살길은 여전히 암담했고 마른 몸 누일 누추한 공간 하나 마련하기가 어려웠다.

"송곳 꽂아 넣을 땅조차 허락되지를 않는구나." 어쩔 수 없이 임춘은 장단(長湍) 감악산(紺嶽山)으로 들어갔다.

從此文星不在天/世人雖識塵中隱/四海詩名三十秋/燒丹金鼎功成近.

'이후로 문성(문운을 주관하는 별)은 하늘에 없을 터/내가 속세에 숨어 있음을 세상 사람 누가 알리오/시로 세상에 이름을 알린 지 삼십 년/금 솥 안의 단약(신선이 만드는 장생불사의 영약)이 거의 익었구나.'

설상가상 떠도는 중에 얻은 병마저 손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임춘은 불우했던 인생의 끈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갔으되 그의 글은 남았다. 가전체 소설(사물을 의인화하여 전기 형식으로 서술하는 문학 양식)의 효시인 '국순전(麴醇傳)'과 '공방전(孔方傳)'이 그것이다. 두 작품 모두 사회 비판의식으로 가득했다. 그 외에도 투철한 자아 인식을 바탕으로 수많은 글을 지었다.

그 글을 죽림고회의 일원이었던 벗 이인로가 아꼈다. "선생의 글은 고문(古文)을 얻었고, 시는 이소(離騷)와 시경(詩經)의 풍골을 얻었으니 우리나라에서 벼슬하지 않고도 최고에 오른 이는 임춘 한 사람이다"라고 이르며 자신이 지은 '파한집(破閑集)'에 여러 차례 인용하기도 했다. 고문은 모범으로 삼을 만한 이상적인 글의 비유였고, 이소는 중국 초나라 시기의 대시인 굴원이 지은 장편 서정시를, 시경은 춘추 시대의 민요를 주로 모은 오래된 시집을 가리켰다. 실로 어마어마한 극찬이라 할 수 있었다.

이인로는 한 발 더 나아가 임춘의 유고를 모아 여섯 권의 '서하선생집(西河先生集)'으로 엮었다. 하지만 목판에 새겨 후세에 전하려던 그의 뜻은 돌연한 죽음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다행히 이태가 흐른 1222년(고종 9)에 당시 실권자이던 최우(崔瑀)의 후원으로 간행되었으나 시간이 흐르는 동안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영원히 사라진 줄 알았던 판본은 조선 1656년(효종 7)에 기적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개경에서 거의 1천 리나 떨어진 청도 운문사(雲門寺)의 동호(銅壺·보물 제208호) 속에서 발견된 것이다. 예천임씨 후손들은 감격했다. 임재무(林再茂)가 꼼꼼하게 준비해 1713년(숙종 39)에 다시 펴냈고, 1865년(고종 2)에는 임덕곤(林德坤) 등이 목활자 판으로 재간행하였다.

임춘의 위패는 현재 예천 옥천서원(玉川書院)에 모셔져 있다. 1667년(현종 8)에 옥천정사(玉川精舍)로 건립되었다가 1711년(숙종37)에 유림에서 반유(潘濡)·태두남(太斗南)·송복기(宋福基) 등 3현을 더 추배함으로써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1868년(고종 5)에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으나 1920년에 상현사와 명교당을 복원하였고, 1989년에 현재의 위치인 감천면 덕율리로 이건하였다. 매년 음력 3월에 중정에서 향사를 지내고 있다.

글=김진규<소설가·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 : 예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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