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욱 큐레이터와 함께 '考古 go! go!'] 압독국의 마을, 고대 시지로의 여행 (1)..."국토개발"vs"문화재 보호" 갈등 극복…유물 4만여 점 출토된 곳

  • 김대욱 영남대박물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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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11-18 06:57  |  수정 2022-11-18 07:03  |  발행일 2022-11-18 제21면

1980년대까진 국내 문화재 발굴·보존제도 잘 갖춰지지 않아
개발 중 포클레인 굴착으로 유적 훼손되는 등 조사에 어려움
시지유적 발굴 시발점으로 국토개발 전 발굴전문기관이 전담
구석기 고인돌부터 조선시대 사직단까지 수많은 유물 발굴 성공


대구에서 경북 경산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대구 수성구 시지지역이 위치하고 있다. 고대로부터 이곳은 경산에 속한 생활권이었으나 1981년 대구시가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대구로 편입되었다. 1980년대 후반 이 일대 약 28만평이 택지개발예정지구로 지정되었는데 당시에는 이곳에 그렇게 너른 유적이 형성되어 있었을지 생각지도 못했다.

1990년대에 들어 본격적인 택지개발이 진행되면서 개발에 앞서 구제발굴이 시행되었다. 지금까지 50여 차례의 크고 작은 발굴조사를 통해 4만 점이 넘는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이로 인해 과거의 생활모습을 대략적으로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 즉 구석기시대의 뗀석기부터 청동기시대의 지석묘와 주거지, 삼국시대 초기의 주거지, 삼국시대의 취락과 대규모의 고분군, 그리고 토기가마와 같은 생산유적이 확인되었으며 한참 시간이 지난 뒤 조선시대에는 도자기와 숟가락 등이 출토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사직제를 지내는 사직단이 발굴된 바 있다.

시지유적은 장기간의 발굴조사를 통해 오랜 시기 동안 다양한 형태의 유구가 축조되었음이 확인되었고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금공품이 부장된 대형의 지배계층 무덤(高塚)이 축조되지도 않았고 주목할 만한 명문이나 조형미가 뛰어난 유물이 많지 않았던 탓인지 세간의 주목을 크게 받지 못했다. 그렇게 30여 년이 지나면서 이곳은 지금 새로운 생활 주거지로 변화되었다.

고대의 시지는 지금처럼 대규모의 마을유적이 확인되었다. 이 마을에는 토기를 생산하던 가마소와 이를 제작하던 공방과 대장간, 이들이 거주한 집과 우물, 마을 안에 펼쳐진 도로, 그리고 이들의 무덤이 남아있었다. 오늘은 고대의 시지유적의 발굴 성과를 살펴보기에 앞서 시지유적을 처음 발굴하던 1992년부터 1994년까지의 발굴 사진 몇 장을 통해 당시의 발굴 이야기를 전해드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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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사진은 시지유적의 남쪽 안산에서 북동쪽을 바라보고 찍은 사진이다. 시지지역 택지개발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직전에 찍은 것으로 왼쪽 아래에는 당시 대구농고(현 대구농업마이스터고)가 보인다. 북쪽 먼 곳으로 팔공산이 길게 펼쳐져 있으며 그 아래엔 금호강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다.

사진2

두 번째 사진은 발굴조사 전 개토제(開土祭)를 지내는 풍경으로 시지지역에 산재해 있던 고인돌 유적을 조사하기 전 발굴조사단의 안녕을 위해 고사를 지냈다. 이러한 고사의 의미는 고고학 조사가 종일 현장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불시에 발생할 수 있는 안전사고를 예방하고 좋은 고고학적 성과를 기원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현장 안전사고 예방은 발굴현장 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이다.

사진3

세 번째 사진은 시지의 마을유적을 본격적으로 조사하는 광경으로 현재 보성타운 및 동서타운과 욱수초등 사이에 난 도로를 조사하는 모습이다. 이곳에서는 주로 얕게 판 집터와 기둥을 세운 건물이 조사되었는데 이들은 주로 생산 공방지로 추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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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사진은 발굴 현장을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 고투하는 모습이다. 이 발굴에서 조사된 마을유적은 그 범위가 워낙 넓어서 사다리로는 도저히 사진 기록을 남길 수가 없어서 크레인을 동원하여 아주 높은 곳까지 올라가서 촬영하였다. 최근에는 드론과 같은 무인항공기로 쉽게 촬영할 수 있지만 당시 조사원들은 좋은 사진을 남기기 위해 이렇듯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사진5

다섯 번째 사진은 문화재 조사와 개발이 공존하고 있는 장면이다. 보통 건축 공사는 발굴조사가 다 완료된 후에 시작하였다. 그런데 시지지역의 택지개발공사는 예상치 못한 문화재 발굴조사로 인해 공사 기간이 부족하였던 탓에 공간을 분할하여 발굴이 완료되는 부분은 바로 공사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사진의 중앙부 포클레인이 작업 중인 곳이 현재 동서타운이 위치한 곳이다.

사진6

여섯 번째 사진은 유적이 파괴되고 있는 현장에 문화재를 보존하고자 하는 이들이 공사 관계자들과 대치하고 있는 모습이다. 당시 시지지역에는 아파트 건립 회사들이 유적을 조사하기 전에 포클레인을 동원하여 유적지를 군데군데 파괴하곤 했다. 저 큰 포클레인 앞에서 공사 관계자들과 발굴조사단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모습이 애처롭다.

사진7

마지막 사진은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기 전 포클레인에 의해 훼손된 유적의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표토층에 의해 땅속에 잘 보존되어 있던 문화층이 포클레인의 마구잡이식 굴착으로 그 단면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오늘날에는 유적의 발굴과 보존을 넘어 활용 정책을 논의하는 데까지 이르렀지만 30여 년 전 시지유적 발굴 당시에는 국토 개발에 따른 문화재 보호와 발굴에 대한 인식과 공감대가 크게 형성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대규모 국토개발에 따른 사전 발굴조사 제도도 잘 갖추어지지 못했던 때였다. 심지어 중요 유적의 보존은 개발 당사자의 커다란 반발에 직면하기도 했다. 하지만 1990년대 시지유적 발굴이 있었기에 고속도로의 개설이나 확장, 댐 건설, 대규모의 택지나 산업단지 등 국토개발이 진행되면 반드시 문화재 보호 및 보존을 위한 발굴조사가 진행되는 등 문화재 보호에 대한 인식이 개선될 수 있었다.

이후로도 현재까지 국토개발과 문화재 보존이라는 정책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마찰이 거듭되고 있지만 시지유적 발굴을 시발점으로 학계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도 유적 파괴행위를 막기 위한 인식의 전환과 제도의 정비가 본격적으로 마련되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대규모의 국토개발에 따른 대규모 발굴조사를 발굴조사 전문기관이 전담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는 우리나라 발굴사(發掘史)에 획기적인 일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영남대박물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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