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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에서 태어났지만 영주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방학이 되면 안동 와룡면 큰집에 놀러 갔다. 당시 안동역에서 큰집까지 교통수단은 택시뿐이었다. 우리는 영주역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옹천역에서 내렸다. 큰집까지는 한두 시간은 족히 걸었다. 심지어 산과 들을 넘어 다녔다. 아버지·동생과 같이 걸어서 다녔던 그 길이 지금까지도 오래 기억에 남아있다.
헤르만 헤세는 유년의 기억을 담은 '데미안'으로 문학예술을 불 피웠다. 글을 쓰는 내게 안동에서의 유년은 소중한 자양분이다. 순수 그 자체였다. 40여 년 서울 생활은 그 순수를 갉아먹었다. 내 몸을 침범하는 비정한 사회는 내가 기억하는 인본 말살을 원했다. 내 의식에 박힌 그 순수를 내 작품 속으로 저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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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임병애 |
소설가가 되겠다는 희망은 유년 때부터였다. 그냥 혼자서 습작을 했다. 모 대학 국문과 신문에 소설가 강의 홍보가 났다. 작가는 강준용이었다. 마침 동서문학에 난 '반쪽의 유희'를 읽은 후 늘 의식에서 떠나지 않았던 그 문제의 소설가였다. 그 강의를 들은 후 나는 내 작품을 강준용한테 보여 줄 수 있었다. 그는 나의 습작품을 단숨에 혹평했다. 크게 상처를 받고 좌절을 하였다. 그를 보면서 나의 한없이 부족한 면을 보게 되었다. 혼자 우울한 나날을 보내다가 호주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새로운 문학을 시작하려 했다. 그러나 갈수록 습작은 나를 옭아맸다. 나는 호주 유학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내 문학의 방향은 '강준용 문학'이었다. 나는 그의 혹평을 딛고 점차 성숙해갔다.
1996년 '예술세계'에 '유년의 빛'이란 단편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올해 첫 소설집 '공간에서'(좋은 작가 刊)를 출간할 수 있었다. 모두 9편의 단편이 탑재돼 있다. 등단 시기에 비해 작품집 출간이 많이 늦은 편일 수 있다. 나 자신이 많이 게으르고 또 작품은 언제든지 묶을 수 있다는 생각도 있었다. 평생 은둔자로 살았던 에밀리 디킨슨에 대해 읽은 적이 있는데 은근히 그녀의 삶으로부터 위로를 받기도 했다.
일단 내 의식이 든 작품을 책으로 냈단 것에 만족한다. 작품은 작가이다. 자신의 모습을 아무렇게나 내놓는 삼류가 되지 말란 것이다. 절대 작품의 숫자가 아니라 단 한 편의 명작을 쓰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화려한 기교와 화려한 문장보다 진실, 내면의 솔직한 진실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순수의 진실, 진정성만이 큰 울림을 줄 수 있다.
내가 쓴 작품이지만 때로는 낯선 작품들도 있고 진짜 내가 썼나 싶은 작품들도 많다. 그중 '공간에서'를 가장 아낀다. 몇 년에 걸쳐서 수정과 수정을 거듭해 완성된 작품이다. 내가 지향하는 의식과 현실 속 현재의 존재, 나의 의식을 단어로 형상화했다고 판단한다. 그런대로 만족한 작품이다.
한밤에 작품을 집필한다. 그러나 갈수록 작품 집필에 겁이 난다. 쓰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는 내 창작은 섣불리 작품을 탈고하지 못하게 된다. 그 완성도를 위해 나는 과작의 소설가라는 칭호를 듣게 되었다.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초등학교 때부터 했다. 소설은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소설가가 된 후부터 내 삶의 희망을 이루었다. 더 이상 욕심은 없다.
갈수록 예술적 작품보다 흥미 위주의 작품들이 판을 친다. 그것이 시대상의 주류라 해도 인본의 순수한 의식이 문자화된 예술적인 서사문은 창작되어야 한다. 이름난 문학상 받았다는 작품이 예술품으로 둔갑 되는 현실이다. 등단지가 많아 누구나 소설가가 되는 이 현실, 좋은 작가와 작품을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이 나의 기우이길 바란다.
정리=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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