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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형 (문화평론가) |
예전에 드라마작가 한 분에게 매우 인상적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때는 90년대 후반, 당시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모든 드라마 작가들에게 일련의 강력한 가이드 라인을 제시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일테면 이런 식이었다. '어떤 오토바이 날치기가 돈 가방을 강탈해서 도망을 친다. 주인공 형사는 황급히 근처에 주차된 자신의 자동차로 뛰어가 차에 올라탄다. 그리고 급하게 시동을 걸고 오토바이를 추격한다…' 라고 작가가 썼다면, 이것은 엄중한 제재를 받았다는 것이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일까?
정답은 간단하다. 주인공 형사가 안전띠를 매는 장면이 빠졌던 것이다. 실제로 이전까지 드라마에서는 이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방통위에서 제재를 가하지 않아서라기보다는 현실이 실제로 이랬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작가들은 크게 반발을 했다고 한다. 주인공이 촌각을 다투며 범죄자를 추격하는 장면에서 굳이 안전띠를 매는 답답한 장면을 꼭 넣어야 하나? 이렇게 하면 극의 리얼리티가 너무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이것 외에도 제재를 받을 장면은 많았다. 담배 피우는 장면을 빼라고 하니 그 뒤로는 드라마 속에서 누구도 담배를 피울 수 없었고, 미성년자는 절대 술을 못 먹게 하라 하니 그 뒤로는 불량청소년 캐릭터도 절대 술을 마실 수 없었다. 아무튼 이렇게 방통위가 밀어붙이기 시작하자 TV 드라마 속은 실제 세상과는 완전 다른 동화 같은 세상이 되어버렸다.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 그 드라마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처음에는 드라마와 세상이 괴리되어 있더라고. 그런데 자꾸 그걸 반복하니 희한하게도 세상이 드라마 속처럼 변해가기 시작했어. 나중에는 자부심까지 느껴지더군. 우리가 안전띠를 매는 장면을 매번 넣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었던 거야." 이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드라마는 재미있는 볼거리이고 사람들은 그런 화제성이 큰 매체에 반응한다. 그래서 재미없는 전문가들, 일테면 경찰이, 선생님이, 의사가, 정치인이 백날 떠드는 것보다 드라마의 메시지가 더 크게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최근 추신수 선수가 '학폭 가해자'인 안우진 선수를 감싸는 듯한 발언을 하며 우리 사회에 엄청난 파문을 낳았다.(팬의 한 사람으로서 추 선수에게 가해지는 과도한 비난은 안타깝지만, 그게 어쩔 수 없는 것도 사실인 것 같다.) 이 사건은 언뜻 보면 추 선수를 비판하는 엄청난 수의 국민이나 기자, 다시 도마 위에 오른 안 선수, 심지어 논란을 일으킨 추 선수 본인까지 모두가 기분이 좋지 않은 마이너스의 해프닝으로 끝난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이 소동은 오히려 우리 사회에 엄청난 플러스의 효과를 남기고 있는 측면이 있다. 생각해 보라. 이걸 계기로 우리는 어린 학생들에게 다시 한번 학폭에 대한 엄격한 경종을 울릴 수 있게 되었다. 슈퍼스타의 다소 경솔했던 발언이 의도치 않게 '화제성이 큰 드라마'와 같은 효과를 내버리고 만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드라마 속의 안전띠 매는 장면이 수천 명을 살렸듯이 앞으로 발생 가능할 수천·수만의 학교 폭력을 미리 막아주는 엄청난 효과를 낼 것이 분명하다. "얘야, 절대로 아이들 때리면 안 된다. 추신수, 안우진 욕먹는 거 봤지? 이제 우리 사회는 학폭 가해자를 절대 용서하지 않아!"
역으로 어떤 선수가 "우리 모두 학폭을 저지르지 맙시다!" 식의 형식적인 캠페인을 벌였을 경우, 그것이 얼마나 소리소문 없이 잊히고 끝났을까를 생각해 보면, 참으로 세상은 아이러니하기 그지없는 곳이다. 어쨌든 교훈은 두 가지. "학교 폭력은 절대 안 됩니다!" "뭐든 화제성이 있어야 효과도 큽니다!"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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