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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국사 칠층석탑과 늙은 배롱나무. 선국사 대웅전은 순조 2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보물 1517호인 건칠아미타여래좌상을 모시고 있다. |
남원 시내 서북쪽 해발 520m 교룡산
계곡 가운데 두고 두 봉우리 감싸게
삼국시대 백제가 축조했단 교룡산성
홍예문 지나자 비석군과 폐허 된 마을
몇 걸음마다 가쁜 숨 쉬며 오른 길 끝
임란 승병 주둔지이자 동학군 은신처
3·1 민족대표 백용성 출가 천년고찰
보제루선 지리산 자락·남원 한눈에
◆교룡산 교룡산성
교룡산은 남원 시내 서북쪽에 있는 높이 520m의 산이다. 산에는 봉우리가 두 개 있어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안고 비상하는 형국이라 교룡(蛟龍)이라 부른다고 한다. 계곡을 가운데에 두고 두 봉우리를 감싸고 있는 포곡식 산성이 교룡산성이다. 축성의 내력은 명확하지 않지만 형식으로 보아 삼국시대 백제가 축성한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초기 세종 시절에 군창(軍倉)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 때는 의승장 처영(處英)이 성을 수축하고 지켰다고 하며, 선조 30년인 1597년에는 남원부사 최염(崔濂)이 주변 일곱 고을의 군사를 징발해 중건하였고, 이후 숙종 때도 공사가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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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은 잘 다듬은 돌을 이용하여 견고하게 쌓았다. 세공한 듯 단정한 계단 위에 부드러운 연인의 팔처럼 둘러진 옹성이 그 너머를 감추고 있다. |
성벽은 자연석이 아니라 잘 손질된 돌로 섬세하게 쌓여 있다. 이곳에 곡성과 옥과, 구례, 창평, 장수, 운봉 등 인근 군현에서 거둔 군량미를 전부 저장하고 병력을 배치했다고 전한다. 지금은 동문과 옹성 그리고 동쪽 수구와 성벽이 조금 남아 있을 뿐이지만, 교룡산성은 남원 지역 20여 개의 산성 중 그 형태가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옹성에 안긴 홍예문이 교룡산성의 동문이다. 양쪽 3단으로 쌓인 장대석 위에 아홉 개의 돌이 무지개를 만들고 있다. 동문 안쪽 낮은 축대 위에는 몇 개의 비석이 서 있다. 대개 교룡산성을 지켰던 역대 무관 별장들의 기적비라 한다. 그중 '천총이진택중건기루 영세기속숭정5년병자5월일'이라 새겨진 비석이 있는데, 인조 14년인 1636년에 이 동문초루가 중건된 것으로 해석된다.
비석군 위로 보이는 연두색 집은 교룡산장 식당이다. 지붕을 새로 얹고 벽도 단장한 것을 보니 내내 건재했던 모양이다. 오늘 식당은 문을 꼭 닫은 채 조용하고 계곡 너머 닭장을 지키는 개는 순한 눈을 몇 번 끔뻑이다 먼 데로 눈길을 돌린다. 잘 닦은 터에 동그마니 자리한 세 칸 작은 집은 까맣고 냉랭한 표정으로 폐허가 되어가고 있다. 조선시대 전국읍지인 '여지도서'에 따르면 교룡산성 안에는 산성리라는 마을이 있어 18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언젠가 그들은 모두 이주하였고 이제 마을은 존재하지 않는다.
길은, 가파르다. 몇 걸음마다 학학 가쁜 숨이다. 적요한 공간, 한기가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오르는 길 따라 아래로 흐르는 좁은 계곡은 하얗게 얼었다. 오른쪽으로 난 제법 널찍한 길에 '덕밀암(은적암) 등산로'라는 푯말이 서 있다. 은적암은 수운 최제우가 1861년과 1862년 사이에 은거하면서 수도와 집필 활동을 하던 곳이다. 최제우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동학(東學)'이라는 명칭을 탄생시켰다고 한다. 지금 은적암은 터만 남아 있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던 1894년, 그해 12월 마지막 날 은적암은 일본군에 의해 소각되었다. 산을 오르던 돌길이 갑자기 하얀 시멘트 길로 바뀐다. 두 번째로 왔던 어느 여름날로부터 십 년도 더 흘렀고, 그 아름답던 돌길은 이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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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이 성벽의 모서리에서부터 옹성의 둥근 벽을 따라 부채처럼 펼쳐지면 그 너머에 감춰져 있던 것이 활짝 드러난다. 교룡산성의 홍예문이다. |
◆산성절 선국사
하얀 길 끝에 검은 축담이 높다. 선국사(善國寺)다. 담 너머로 반신을 드러낸 요사채는 뽀얗던 기둥에 더께가 앉았고 곁에는 새로운 요사채가 들어서 있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산길의 적요함이 절집까지 따라온다. 축담 앞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넓은 마루의 보제루가 시원하게 서 있다.
선국사는 통일신라 신문왕 5년인 685년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당시 절 근처에 용천이라는 샘이 있어 용천사라 불렸다가 후에 선국사로 명명되었으나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나라의 안녕을 비는 절이라는 뜻에서 선국사로 고쳐 불렀다고 하고, 스님들이 나라를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했다 하여 선국사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요즘 사람들은 산성절이라 부른단다. 예전에는 300여 명의 승려가 기거한 대규모의 절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교룡산성을 지키는 본부였고, 임진왜란 때는 승병의 주둔지였으며, 동학농민운동 때는 동학군의 은신처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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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칸의 커다란 보제루는 산자락에 걸터앉아 멀리 펼쳐진 지리산 자락과 그 아래 남원 시가지를 시원하게 담고 있다. |
요사와 보제루 사이 계단을 오르면서 석탑과 석탑을 안은 배롱나무를 마주한다. 늙은 배롱나무는 앙상한 가지인 채로 자신의 빈 여백을 힘껏 펼쳐 오래된 석탑을 끌어안고 있다. 저이들은 변함없이 애틋하다. 그들 오른쪽에 작은 대웅전이 자리한다. 선국사 대웅전은 순조 2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안에 모신 부처님은 '건칠아미타여래좌상'으로 보물 1517호다.
작은 법당 안 한쪽을 몽땅 차지하고 있는 것은 '선국사 대북'이다. 소나무 통목에 쇠가죽을 씌워 만든 것으로 둘레가 269㎝, 지름이 79㎝에 이른다. 이 외에도 대웅전에는 임진왜란 당시 나라에서 만들어준 승병의 인장인 '교룡산성승장동인'이 보관돼 있다. 천장을 가로지르는 굵은 대들보 위에서 용이 고개를 내밀고 쳐다본다. 선국사 대웅전에는 유난히 용이 많다. 부처님의 머리 위 닫집에도, 대웅전 현판의 양쪽 기둥 위에도 용머리 장식이 있다. 참 오래 늙어온 대웅전은 퇴락한 단청도 웅장한 공포도 여전히 아름답다.
아래 마당의 북쪽 단에 미륵보살이 서 계신다. 그리고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인 백용성(白龍城) 대종사가 이곳에서 처음으로 출가했다는 안내판이 있다. 대웅전의 정면으로 보제루를 본다. 네 칸의 커다란 보제루는 산자락에 걸터앉아 멀리 펼쳐진 지리산 자락과 그 아래 남원 시가지를 시원하게 담고 있다. 선국사 대북을 둥둥 울리면 천지를 채운 북소리가 저 시가지까지 닿았을 듯하다. 그러고 보니 상처투성이였던 보제루가 흉터도 없이 말끔하다. 선국사는 새롭게 늙어가고 있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 Tip
12번 대구광주고속도로 남원IC로 나와 우회전해서 직진, 서문사거리에서 우회전해 계속 직진하면 된다. 승용차는 교룡산성 동문 앞까지 갈 수 있고, 교룡산 초입 교룡산국민관광단지 주차장을 이용해도 된다. 주차비는 무료다. 동문에서 산길로 300m쯤 오르면 선국사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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