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씨족의 출발, 성과 본관

  • 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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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3-17 09:12  |  수정 2023-03-17 09:57  |  발행일 2023-03-17 제35면
고려~조선 1천년간 '씨족 사회'…나라 동력의 곳간이자 미래세대 키우는 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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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건국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가 담긴 경주 탑동의 나정.

우리나라는 씨족사회였다. 향리는 동성 마을로 수백 년 동안 일가친척이 모여 살았고 혈연공동체로 같은 성을 가졌다. 성은 백 가지가 넘어 왕조시대 나라 국민을 백성(百姓)이라 했고 한번 취득한 성은 바꾸지 않았다. 성씨 시조의 고을이 본관이다. 성과 본관이 합쳐진 이름으로 씨족이 탄생하여 역사 속에서 부침과 명멸을 거듭하다가 오백여 년이 지난 15세기부터 그들의 연원을 추적해 족보를 만들었다. 씨족은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고 왕조의 경계를 뛰어넘었다. 붕당의 토대가 되었고 붕당에 끈질긴 생명력을 부여한 것도 씨족이었다. 같은 땅에서 태어나 같이 풍상을 겪었는데 오늘날 씨족 번성에 엄청난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①신라 성 ②고려 태조가 하사한 성
③본인이 선택한 성 ④中서 넘어온 성
현재 500여개…상위 5개 성씨가 50%
본관, 시조 출생지·왕이 내린 본관지
수대 걸친 선조이야기·연원·무덤 추적
안동권씨·문화유씨가정보 족보 시작


◆성(姓)의 생성

우리나라 성은 삼국시대에 처음 생겼다. 고구려의 을지·연, 백제의 부여·흑치처럼 역사 속에 등장하지만 본격적인 성씨라기보다 지배계급의 칭호로 사용된 듯하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고구려와 백제 성(姓)은 사라지고 신라 성만 남게 됐다. 신라는 박·석·김의 세 왕족과 이·최·정 등 육부촌의 여섯 귀족, 견당유학생 등 일부 계층만 중국식 성을 사용했다.

본격적인 성(姓)의 생성은 고려 건국과 더불어 시작됐다. 극심한 혼란기를 거치고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은 왕조 통치방법의 일환으로 개국공신에게 중국식 성을 하사하고(賜姓), 지방 호족에게는 당해 거주지의 우월적 지배권을 인정하는 토성(土姓)을 분정(分定)함으로써 성관(姓貫·성+본관) 형성이 시작됐다. 사성을 받은 공신들은 대부분 당해 성씨의 시조가 됐고, 토성 분정은 군현제 개편과 더불어 지방 호족들에게 한자로 된 중국식 성을 나누어 주고 고을의 지배권을 인정해 주어 본관의 시초가 됐다. 혼란기 유이민을 정착시키고 백성을 지역별로 관리하여 사회질서를 확립하려는 수단이었다.

고려사 태조세가에 등장하는 인물을 살펴보면 940년(태조 23)을 기준으로 이전에는 이두식 고유명 인물이 많다가 그 이후부터 중국식 한자이름이 점차 일반화됐고, 광종을 거쳐 성종 대에 이르면 관리 명부에 이두식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개국공신 신숭겸, 홍유, 배현경, 복지겸도 통일 이전에는 삼능산, 홍술, 백옥, 복사귀로 불렀다.

사성과 토성 분정으로 시작된 성씨 체계는 1055년 문종이 과거시험에 성과 본관을 가진 자, 즉 씨족록에 등재된 자만이 응시할 수 있도록 법령을 개정하자 공적자격 획득에 성과 본관이 필수요건으로 자리 잡았으며 이후 일반 백성들도 점차 성을 취득하게 됐고 노비 화척 등 천민은 계속 무성층(성이 없는 계층)으로 남아 있다가 구한말 갑오개혁으로 성관을 취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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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뿌리공원에 있는 우리 씨족 형상을 나타낸 조형물.

◆성(姓)의 취득

우리나라 성은 신라 성, 고려 태조가 하사한 성, 본인이 선택한 성, 중국에서 넘어온 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취득 과정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거나 모계 성을 따르거나 하사받거나 본인이 선택하거나 노비의 경우 주인의 성을 따라 취득했다. 한자문화 영향으로 모두 중국식 한자로 돼 있으며 대부분 중국 성을 모방했다.

성씨가 처음으로 나타나는 문헌은 세종실록지리지이다. 토성분정 이후 수백 년에 걸쳐 고을별로 정착한 토성(土姓·토박이 성), 내성(來姓·이주해 온 성), 망성(亡姓·없어진 성) 등이 표기돼 있으며 성의 개수는 250여 개이다. 토성은 고을마다 5~10개씩 있는데 해당 고을에 오랫동안 세거한 주된 씨족으로 인구와 기반에 따라 차등적으로 존재했다.

한번 취득한 성을 바꾸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성을 바꾸면 환부역조(換父易祖)라 하여 조상을 바꾸는 무리로 큰 욕이 됐고 차라리 성을 갈겠다고 하면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다는 의미였다. 출신 성분을 숨겨야 되는 특별한 경우에는 한자에 약간의 변화를 가해 새로운 성을 만들기도 했다. 백성은 성과 이름을 3년마다 호구단자에 기재하여 관아에 제출했다. 성은 역사 속에서 명멸을 거듭했으며 오늘날 500여 개 성이 있으며 상위 5개 성씨가 총인구의 50%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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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중구에 소재한 한국 족보 박물관 전경.

◆본관의 취득과 분화

본관은 성씨의 시조가 태어난 고을로 관향(貫鄕)이라 부르며 성 앞에 붙이는 우리나라의 고유의 성씨체계이다. 고려 태조가 지방호족에게 토성을 분정할 때 거주 고을 을 나타내는 데서 출발했다. 본관은 시조의 출생지뿐만 아니라 왕이 내려 준 봉군지(封君地)나 사패지(賜牌地)도 해당됐다. 주·군·현은 물론 작은 고을인 향·소·부곡까지 해당됐고 고려 국경인 평양~원산만 이북지방의 고을은 보이지 않는다.

시조 고을에서 일족이 흩어짐에 따라 수많은 본관으로 분화됐고 같은 성씨라도 본관이 다르면 점차 다른 씨족으로 여겨졌다. 글을 잘 짓는 연암 박지원이 집안 친척의 비문을 쓰면서 박씨 성의 분화에 대해 언급했는데 신라왕족에서 출발한 박씨가 수없이 분화하다가 고려시대에 여덟 망족(望族)이 됐는데 이를 8박(八朴)이라고 했다. 8박 중 경상도 밀양박은 대성(大姓), 전라도 반남박은 벌족이 됐고 함양박·무안박·순천박·고령박은 영남에 반촌을 만들었다.

본관은 거주지역을 나타내므로 이름 없는 고을은 기피되고 작은 속현 고을일지라도 진보, 풍산, 기계, 해평, 초계 등과 같이 뛰어난 인물이 배출되면 계속 존립했다. 무명 고을의 본관은 점차 큰 고을로 흡수되거나 원래 본관으로 환원됐다. 본관 개관은 비교적 용이했으며 여말선초가 되면 행정구역 개편과 더불어 본관의 통합과 분관은 끝나고 이후 씨족의 분화는 동질성을 유지한 채 갈라지는 분파의 형태를 띠게 된다.

오늘날 성관 수는 3천400여 개로 조선 초보다 1천100여 개가 감소했다. 흔히 대성이라 부르는 10개 성관이 총인구의 35%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이들이 자체적으로 번성을 했겠지만, 15세기 이후 무성층(無姓層)의 지속적인 성관 취득과 양란 이후 혼란기에 이들 성관으로 유입된 인구가 많았기 때문이다.

최근 경상도 단성현의 호구단자로 무성층의 성관 취득과정을 연구한 자료에 따르면 1678년에는 전 호수의 45%만 성을 가지고 있었고 백년이 지난 1786년에는 87%까지 상승했다. 무성층은 대부분 본관을 먼저 얻고 성을 나중에 얻는 과정을 거쳤다. 본관은 지리적으로 가깝거나 인구가 많아 자신들에게 익숙한 지명을 선호했고 성은 자기가 거주하는 지역에 흔하면서 신분 장벽이 높지 않은 성씨를 선택한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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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이씨 족보 목판 〈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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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조씨 족보 일부, 1767년 간행.

◆족보와 뿌리 찾기

족보는 씨족의 과거를 연대순으로 재현한 기록이다. 성리학이 확산됨에 따라 보종(補宗)이 중요시되면서 15세기에 처음 만들어졌고 18세기가 되면 대부분의 씨족은 족보를 가지게 됐다. 10세기 토성분정 이후 오백 년 동안 조상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뿌리를 찾는 일은 무척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구두로 내려오는 선조이야기와 빛바랜 비문, 땅속에 묻힌 지석에서 출발했다. 수대에 걸쳐 실낱 같은 기록을 전거로 삼아 조상의 연원과 무덤을 추적하여 씨족의 자랑스러운 과거를 밝히는 일은 삼백 년간 계속됐다. 1476년 안동권씨성화보, 문화유씨가정보에서 시작된 족보는 18세기에 절정을 이루었고 일제 때 근대 인쇄술이 도입되면서 가장 많이 발간한 간행물은 족보였다.

족보에 기록된 전설 같은 시조이야기는 사서에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고 일부는 모화사상의 영향으로 미화되거나 각색됐다. 비록 사실관계에 대한 고증이 불확실하여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족보는 씨족의 연원을 밝혀 빛나게 했고 우리 역사의 미세사(微細史)를 일깨워 사료적 가치가 크다. 시조로부터 시작된 가문의 정체성과 가계의 오랜 연원은 대외적으로 힘과 위세를 나타냈고 씨족 문중인의 일체감과 동질성을 심화시켰다. 또 족보가 만들어지자 씨족 내 세대를 명확히 하기 위해 항렬이 생겼다. 항렬은 금수목화토의 오행이나 천간으로 만들어 같은 세대는 같은 항렬을 썼고 모든 씨족이 이 원칙에 따라 항렬자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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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족의 생성과 부침

성과 본관이 결합하여 탄생한 씨족은 역사상 강력한 집단이 되어 고려·조선 천년왕조를 씨족의 나라로 만들었다. 고려왕조를 귀족의 나라라 했고 일부 현달한 씨족들은 자신을 해동명족 삼한갑족 신라귀성이라 불렀다. 무신정권이 출현하자 새로운 씨족이 등장했으며 충선왕은 권문·세족의 15개 씨족을 재상지종(宰相之宗)으로 선정하여 왕실의 족내혼 혼인을 족외혼으로 바꾸었다.

씨족은 항구불변이 아니라 어느 때라도 새로운 씨족이 등장하여 나라를 이끌었다. 여말의 강력한 22개 문벌집안 가운데 고려 초기의 세족은 5개뿐이고 나머지는 신흥씨족으로 교체됐다. 씨족은 왕조의 경계를 뛰어넘어 역사를 관통했고 국토를 가로질렀다. 성종 때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조선전기 이름난 씨족을 거족(巨族)이라 하면서 76개를 언급했는데 그중 50% 이상은 임진란 전후에 쇠퇴하고 새로운 씨족이 조선후기 붕당의 중심에 섰다. 750여 씨족이 조선왕조 문과과거에 급제했다.

씨족은 혼인, 임지, 사화, 전란, 기근 등의 사유로 본향이나 수도를 떠나 전국으로 퍼졌다. 시조를 대신한 입향조를 중심으로 동성마을을 만들었고 종가와 장자 중심의 조상 받들기는 신앙처럼 강했다. 근대로 넘어오면서 나라가 어려울 때 나라 위해 함께한 이들은 씨족형제였다. 씨족은 나라 동력의 곳간이었고 미래 세대를 키우는 요람이었다. 우리가 몰랐던 우리 역사의 얼굴이며 전근대기 소중한 인류문명의 자취라고 많은 외국인 사학자들이 우리 씨족을 연구하고 있다. 여행작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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