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완 칼럼] 민본정치는 여론을 배척하지 않는다

  • 박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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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3-16  |  수정 2023-03-16 08:57  |  발행일 2023-03-16 제22면
강제징용 배상안 한국 완패

빈손으로 면죄부 상납한 꼴

야구나 외교나 빼닮은 下級

현대시민은 '포노 사피엔스'

"국민과 다투면 최악 정치"

[박규완 칼럼] 민본정치는 여론을 배척하지 않는다
논설위원

대통령실이 KBS 수신료와 전기요금을 분리 징수하는 방안에 대한 여론 수렴에 나섰다. 현재는 한국전력이 업무를 위탁받아 월 2천500원의 TV 수신료를 전기요금과 통합 징수한다. 지난해 KBS의 수신료 수입은 6천935억원. 통합 징수를 둘러싼 불만 민원이 폭주하고 소비자 선택권을 제한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된 만큼 여론은 분리 징수를 선호할 게 분명하다.

정부가 국민여론을 알뜰살뜰 챙기겠다니 상찬할 만하다. 다만 여론 따윈 아랑곳하지 않던 윤석열 정부의 변신이 새삼스럽긴 하다. 하기야 'KBS 수신료' 계륵을 건드리는 건 꽃놀이패 아닌가. 분리 징수를 관철하든 못하든 민심을 받들었다는 서사는 남을 테니까. 공영방송 압박 효과는 덤이다.

한데 다른 현안에선 걸핏하면 여론을 거스른다. 강제징용 배상안만 해도 그렇다. 한국갤럽 조사에선 국민 59%가 반대하고 35%만 찬성이다. 여론에 맞서려면 당위성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마저 없다.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빠져서다. 첫째, 일본정부의 사죄가 없다. 사죄는커녕 기시다 총리는 "역대 내각의 역사 인식을 전체적으로 계승하겠다"고 뭉뚱그렸다. 전체적으로 계승? 설마 아베 정권의 극우적 인식까지 아우르겠다는 건지.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계승한다는 말은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럼에도 국내 보수언론은 친절하게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계승한다는 의미"란 부연을 달았다. 둘째, 전범기업의 배상이 없다. 국민 64%는 "미래 세대를 대상으로 한 가해기업의 기부는 배상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구상권까지 포기하면서 일본에 면죄부를 상납한 꼴이니 한국의 완패다. 야구나 외교나. 실력도 없고 전략도 달리고 인내도 없다는 게 빼닮았다.

"강제동원은 없었다"는 하야시 외무상의 역사 왜곡에 숨어있는 행간의 함의는 뭘까. '물컵의 절반'을 채울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진중권 광운대 특임교수가 한 수 거들었다. "한일 셔틀외교를 복원한다는데 우리가 '빵셔틀'이고 일본은 일진"이라고 했다나. 한일 간 형세를 적확히 묘사한 촌철살인의 풍자다.

'50억 클럽'과 김건희 여사 특검도 국민 60% 이상이 찬성한다. 검찰 수사의 편향성이 결정적 동인(動因)이리라. 이재명 민주당 대표 주변을 훑을 땐 저인망에다 전광석화의 압색 신공을 시전하면서도 '50억 클럽'이나 김 여사 수사엔 손이 오그라들었다. 이재명을 향한 여당의 공격 루틴은 "떳떳하다면 검찰에 출석하고 법원에서 영장 심사를 받으라"였다. 김 여사 또한 떳떳하다면 특검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이재명 방탄'이란 여권의 방어 기제는 너무 남용해 이젠 진부하고 식상하다.

'사기(史記)' 화식열전편엔 "제일 잘하는 정치는 국민의 마음을 따라가는 정치, 그다음이 국민을 이익으로 이끄는 정치, 최악의 정치는 국민과 다투는 정치"라는 대목이 나온다. 사마천의 민본 사상의 발로다. 현대시민은 고등교육으로 업그레이드하고 SNS로 정보를 공유하는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다. 중우(衆愚)로 치부할 대상이 아니다. 그러기에 여론 나침반은 대체로 옳은 방향을 가리킨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는 국민여론을 뭉개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대통령실 용산 이전, 강제징용 배상안 등 휘발성 강한 국가 대사를 대통령 의지에 따라 밀어붙였다. '임기 5년' 대통령이 자주 여론을 배척하면 자칫 '민주'와 '공화'의 가치마저 훼손할 수 있다. 여론에 순응하는 게 곧 민본정치의 발현이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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