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완 칼럼] 粉飾(분식)의 덫

  • 박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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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5-04  |  수정 2023-05-04 06:55  |  발행일 2023-05-04 제22면
윤 대통령 '일본 무릎' 발언

恣意的 주어 대입해 망신살

'핵공유' 주장 실없는 윤색

분칠 말고 '생얼' 보여줘야

반도체법 실효 조치도 미흡

[박규완 칼럼] 粉飾(분식)의 덫
박규완 논설위원

2012년 대선 직전, 미국 타임스지가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표지 모델로 싣고 'The strongman's daughter'란 제목을 달았다. 독재자의 딸이란 뜻이었다. 하지만 새누리당은 이를 실력자의 딸, 강력한 지도자의 딸로 윤색했다. 'strongman'은 독재자, 실력자, 차력사 등 복수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자 타임스지는 온라인판에서 'The dictator's daughter'로 수정했다. 본의를 왜곡할 빌미를 아예 없앤 것이다. 'dictator'는 독재자 말고는 다른 의미로 해석할 여지가 없다.

2023년, 이번엔 주어 생략 논란이다. 대통령실은 '일본 무릎' 발언의 파장을 예견했을까. 윤석열 대통령의 워싱턴포스트 인터뷰 기사를 소개하면서 주어(저는)를 슬쩍 뺐다. 유상범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이 "주어는 일본"이라며 바통을 받았다. "100년 전에 일어난 일 때문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생각을 (일본이) 받아들일 수 없다." 대통령실과 여당이 사전에 조율했다면 기막힌 공조체제다. 하지만 워싱턴포스트 기자의 원문 녹취록 공개로 여권의 분식(粉飾)은 금방 들통났다. 대통령을 두호하려다 망신살이 뻗친 꼴이다.

윤 대통령의 미국 방문도 마찬가지다. 있는 그대로의 '생얼'을 보여주면 될 텐데 분칠하고 싶어 안달한다. 그리 생색내고 싶을까. '핵공유' 파문도 성과 집착이 빚은 해프닝이다. '워싱턴 선언'은 미국의 핵우산을 더 강고히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핵공유는 아닐지라도 진전된 확장억제 조치라는 데 누구나 동의한다. 굳이 핵공유로 분칠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과 국민의힘 박대출 의원, 신원식 의원은 "사실상 핵공유"라고 윤색했다. 기실 '사실상'은 온전하지 않을 때 쓰는 표현이다. 하지만 미국은 '사실상 핵공유'란 말도 인정하지 않았다. "핵공유는 아니다"며 선을 그었다. 대통령실과 여당만 머쓱해졌다. 갑론을박이 이어지자 조태용 국가안보실장이 정리했다. '핵억제 동맹'이라고. 진솔하고 명쾌한 정의(定義)다.

분식보단 실익이다. '핵억제 동맹'은 분명한 성과이지만 핵확산금지조약(NPT) 준수 확인으로 핵무장 여지를 우리 스스로 차단했다. 한미원자력협정 개정과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문제는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일본은 일찌감치 핵연료 재처리를 용인받았건만. 넷플릭스의 4년간 3조3천억원 투자에 대한 공치사도 계면쩍다. 넷플릭스의 K-콘텐츠 투자 규모는 2021년 8천400억원, 지난해 6천억원이었고 올해는 8천억원을 확정했다. 매년 8천억원 투자는 떼놓은 당상이다. 그런데도 마치 윤 대통령의 역량처럼 호들갑을 떨지 않았나. '오징어 게임' 같은 인기 콘텐츠의 자력(磁力)이 없었다면 넷플릭스가 한국 투자를 결정했을까. '윤비어천가'가 지나치면 자칫 '숟가락 얹기'로 비칠 수 있다.

한미 정상이 '차세대 핵심·신흥기술 대화' 신설 등에 합의했지만 당장 우리 손에 쥔 건 없다. 정작 중요한 인플레감축법(IRA)과 반도체지원법을 두곤 "긴밀히 협의하겠다"고만 했다. 한국기업에 대한 예외조항 설정이나 적용기간 유예 같은 실효성 있는 조치가 아쉽다.

분식과 윤색은 때론 본질을 훼손한다. 실없는 화장술에 헛심을 쓸 계제가 아니다. 실익 챙기는 게 급선무다. 포장만 화려하면 뭐하나. 내용물이 허접하면 말짱 도루묵인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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