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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완 논설위원 |
"최고위원 회의 때 윤석열 대통령의 대일 외교 등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면 공천 문제는 신경 쓸 필요도 없다." 태영호 국민의힘 최고위원이 보좌진에게 말했다는 녹취록 속의 이진복 대통령실 정무수석 발언 내용이다. 대통령실이 내년 총선 공천을 주도한다? 여당이 대통령실에 복속하는 역학관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물론 당사자들은 부인한다. "공천을 걱정하는 보좌진을 안심시키기 위한 과장 섞인 내용"(태영호), "자기들끼리 한 얘기고 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이진복).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안철수 의원도 미심쩍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무 일 안 하면 아무 일 안 생길 텐데." 이진복 수석은 지난 3월 치러진 국민의힘 대표 경선 때 '윤심' 논란이 불거지자 "아무 말도 안 하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날 것"이라며 안 후보를 압박했다. 안 의원이 똑같은 말로 되갚은 격이다. 역시 돌고 도는 게 정치다.
비윤계 김웅 의원이 홍심(紅心)을 찔렀다. "녹취록 내용이 사실이면 당무 개입, 공천 개입이라는 중대 범죄를 저지른 것이니 이 수석을 즉각 경질하고 검찰에 고발해야 한다. 태 의원이 전혀 없는 일을 꾸며내 거짓말한 것이라면 대통령실을 음해한 책임을 져야 한다."
녹취록 유출 경위도 미스터리다. 태 의원과 보좌진만의 내밀한 대화였다는데. "물의를 일으킨 그간의 발언이 대통령실과 코드를 맞추다가 벌어진 일"임을 강조하기 위해 태 의원 측이 벌인 자작극이란 소문도 나돈다.
사태가 간단치 않은 건 '용산의 공천권 장악'과 '친윤 패권주의'가 불시에 노정됐기 때문이다. 내년 총선에선 의정활동보다 대통령 옹위 전력(前歷)이나 충성도가 공천 잣대가 될 공산이 크다. 용산 심기만 헤아리는 '꼭두각시 정치'를 추동하는 구도다. 이러니 민심을 등에 업지 못한다. 대통령실과 여당의 자정·견제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걸까. 총선에서 '윤 대통령을 지원해야 한다'는 여론이 37%인 반면 '견제해야 한다'는 응답은 49%였다.(한국갤럽)
늘 공천이 선거 결과를 좌우했다. '진박 감별사' '옥쇄 들고 나르샤' 소동으로 리더십이 붕괴됐던 2016년 새누리당의 예상 밖 패배, 당 대표와 공천관리위원회의 갈등이 폭발했던 2020년 자유한국당의 수도권 참패가 그러하다. 낙하산 공천과 찍어 누르기식 후보 낙점의 부메랑이었다. 이번엔 공천 혁신을 이뤄낼 수 있을까. 난 '어렵다'에 한 표다. 오히려 '찐윤 감별사'가 등장할 소지가 농후하다.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가 정치 혁신 방안으로 제시한 '100% 국민경선'은 딴 행성 얘기처럼 들린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가 "내년 총선에서 초선 의원들은 거의 공천을 받지 못할 것"이라 예단한 것도 여당 공천에 얽힌 복잡한 속사정을 투영한다. 공천 불협화음이 신당 창당의 단초가 될 가능성도 열려 있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정치는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는 국민에게 행복 추구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라 설파했다. 대통령실과 중앙당이 좌지우지하는 하향식 공천은 권력 추구 정치의 또 다른 형태다. 공천 혁신 없이 국민 행복을 추구하는 정치를 구현하긴 어렵다. 1인 권력에 집중되는 공천 패권구도를 혁파하려면 정당정치의 토양부터 정화해야 한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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