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뉴스] 77세 자동차 정비공 가장의 '가족사랑'

  • 최지혜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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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5-30 13:34  |  수정 2023-05-31 16:53  |  발행일 2023-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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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세 나이에도 여전히 자동차 정비일을 하고 있는 이심정 사장이 자동차를 수리하고 있다. 이 사장은 자식들에게 가난과 못배운 한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가족보다 자동차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사진은 동료인 성일카서비스 손승우 사장이 찍었다.
"인생의 보람요. 애들한테는 맨날 미안하지, 잘 못해줘서…. 엇나갈 줄 알았는데 잘 커 주고 잘 사나 못 사나 오순도순 함께하는 부인이 있는 게 고맙고 흐뭇하지 다른 거 없습니다. 내가 좀 배웠으면 가족들이 고생을 덜 했을 텐데, 그게 내내 미안해요"
대구 중구 남산동 자동차 골목에 자리한 자동차 정비소 '신진사' 이심정 사장(77·수성구 수성동)의 말이다. 1977년 자동차 정비를 시작한 그는 팔순을 가까이 둔 지금까지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베테랑이다.

1947년 당시 강원도 울진(1963년 강원도에서 경북도로 편입)에서 태어난 그는 어렵게 초등학교를 마치자마자 곧장 참숯 지게를 져야 했다. 가난한 산골 마을 셋째에게 배움의 기회가 허락되지 않던 시절이다. 가난을 벗어나면 공부를 더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잰걸음으로 하루에 산등성을 두세 번 오르내렸고, 끼니 거르기는 예사였다. 한창 클 나이에 주린 배를 참아가며 등뼈가 튀어나올 정도로 열심히 일했지만 집안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눈을 뜨고 싶어서'라고 표현한 그는 어떡하든 배우기만 하면 가난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지게꾼 품삯으로 모은 130원을 들고 도망치듯 상경했다. 그때 나이 열여섯이었다.

넝마주이에게 붙들려 구걸로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폐유리병 재활용가게, 장갑공장, 연탄공장에 일했지만,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방송 통신중학교 교재를 구해 독학으로 배움에 대한 갈증을 풀어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생각을 바꿨다. 오로지 돈 버는 일에만 전념하기로 마음 먹었다.

"어린 나이에 기술을 배워두면 나이 들어도 먹고 살 수 있겠다는 생각에 그 길로 강릉에 가서 자동차 기술을 배웠어요. 첫날부터 '렌치 몇 미리 가져오라'고 하는데 못 알아들어 공구로 맞기도 많이 맞았죠. 머리통 깨지는 건 예사였어요. 영하 20℃ 추위에 양말 없이 맨발에 고무신 신고 따라다니면서도 '내가 살 길은 이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갈라진 손 틈새에 터를 잡은 까만 기름때와 강단 있는 목소리는 여전히 가난과 싸우는 듯 투지가 느껴졌다.

군에서도 운전병으로 일했다. 제대 후에는 강원도 벌목장에서 산판 트럭 운전과 정비일도 했다. 산판 트럭은 미국 제너럴모터스(GMC)가 1940년대 이후 생산한 차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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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세 나이에도 여전히 자동차 정비일을 하고 있는 이심정 사장이 자동차를 수리하고 있다. 이 사장은 자식들에게 가난과 못배운 한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가족보다 자동차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사진은 동료인 성일카서비스 손승우 사장이 찍었다.

대구와의 인연은 우연한 기회에 시작됐다. 군대 동기를 따라 놀러 왔다가 여비를 벌기 위해 염색공장에 잠깐 발을 들였다가 임금을 제때 못 받으면서 의도치 않게 대구에 정착하게 됐다. 여러 일을 전전하던 그는 '이래서는 가정을 꾸리는 건 물론 아이들 공부 시키기도 어렵겠다'는 생각에 다시 자동차 정비 일을 시작했다. 큰 성공을 바라진 않았다. 내 집 마련의 꿈을 꾸며 빚을 얻어 난생 처음 차린 사업장은 구청 직원의 무자비한 철거에 내려앉았다. 무허가 건물이었던 탓이다. 배움이 짧아 겪는 일이라는 생각에 설움이 북받쳤다.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지만 단칸방에서 고생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떠올라 마음을 굳게 먹었다.

못 배운 한을 아이들에게 대 물리지 않겠다고 절치부심하며 남산동 자동차 골목으로 터전을 옮겨 자리를 잡아갔다. 고무신을 작업화 삼아 성실히 일하는 그를 찾는 손님들의 발길이 늘어나자 주변 상인들의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불법 정비, 수리비 과다청구, 소음 등 억울한 스캔들에 엮이며 아홉 차례나 검찰청에 불려 갔다. 새벽까지 몸이 부서져라 일 했지만 외상값을 떼이는 일도 다반사였다. 80년대 전자식 기화기(carburetor)를 장착한 '스텔라'가 전성기를 맞으며 내 집 장만의 꿈을 이루고 아이들에게 각자의 공부방을 줄 수 있었다.

"그때는 돈 밖에 생각이 안 났어요. 내가 못 배운 게 한이 돼서 자식들에게 가난만큼은 물려주지 않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아이들 마음을 살필 여유가 없었어요. 무작정 혼 낸 적도 많아요." 회상이 이어졌다. "큰 애가 다섯 살쯤, 동물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아이들을 안고 수성동 집에서 달성공원까지 걸어서 다녀온 적이 있어요. 차비가 없어서. 돌아오는 길에 아이가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고 우는 데 그걸 못 사준 게 아직도 마음에 걸립니다. 또 장학금을 받아서 대학 등록금 부담을 덜어준 둘째가 용돈 몇 푼 달라고 하는데 그걸 못 줬어요. 애들이 먹고 싶어 하는 거, 하고 싶어 하는 걸 못해 준 것만 생각하면 마음이 저립니다. 그 녀석이 장성해서 새 차를 선물이라고 주는데 미안해서 도저히 받을 수가 없더라구요. 내가 부모가 되어 보니 가난이 싫다며 뛰쳐나가는 어린 자식의 뒷 모습을 바라 볼 수 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마음은 어땠을지…. 평생 가족들을 위해서 산다고 살았는데 미안함만 남습니다"

이 사장은 가족을 위해 일했지만, 가족보다 자동차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미안하다'는 말이 '사랑한다'로 번역되는 가정의 달 5월. 이 사장의 삶을 통해 먹고 살기 힘들었던 시대를 맨살로 버텨낸 우리 시대 아버지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최지혜 시민기자 jihye7988@naver.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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