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와 세상] 터먼 교수가 보여준 것

  • 권 업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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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6-02 06:50  |  수정 2023-06-02 06:58  |  발행일 2023-06-02 제22면
우수 인재 동부유출 막으려
산학협력단지 조성 창업도와
오늘날 실리콘밸리 모태 돼
최고 두뇌집단인 대학 중심
창업 돌파구로 새비전 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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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업 객원논설위원

KAIST 창의학습관에는 학위수여식이 열리는 터먼홀이 있다. 1970년대 KAIST의 설립에 터먼보고서를 통해 핵심적인 도움을 주었던 프레더릭 터먼(Frederick Terman) 스탠퍼드대 교수를 기념하여 2004년 명명되었다. 그는 저명한 공학자이자 교육자로 "실리콘밸리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이다. 1930년대 주변에 과수원뿐이었던 스탠퍼드대의 졸업생들은 일자리를 찾아 기업들이 집중된 동부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안타까워했던 터먼 교수는 우수한 인재들이 동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산학협력단지를 조성하고 아이디어를 가진 졸업생들이 창업하도록 도와 오늘날 실리콘밸리의 모태가 되었다. 당시 실리콘밸리의 모습을 보면 현재의 대구와 비슷하다. 변변한 직장을 찾아 수도권으로 유출되는 인재들, 인재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 지역 기업들을 보면, 지역 최고의 두뇌집단인 대학을 중심으로 창업을 돌파구 삼아 새로운 비전을 창조했던 터먼 교수가 남달리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기업가 정신을 갖춘 창업으로 혁신생태계의 주체'라는 KAIST의 새판짜기 모델도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교수들의 창업은 기초연구의 실용화와 기술이전을 통해 산업화에 이르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연결고리가 되기 때문에 그간 국가 R&D 정책의 고민거리이던 'R&D 패러독스', 즉 국가 R&D 투입은 많은데 사업화 성과가 부족한 현상의 병목을 뚫는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실적만을 위한 논문 남발이나 장롱 특허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길이기도 하다. 교수 창업의 이러한 국가적 필요성을 넘어 수도권 집중 현상이 극심한 우리나라에서 지방대 교수들의 창업은 지역발전에도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수도권으로 유출되는 인재를 담는 요람이며 혁신역량이 떨어지는 지방기업들의 보완수단이자 중앙정부가 결정하는 지역별 산업 타기팅에서 벗어나 교수 전공에 따라 자유로이 글로벌 시장에 도전할 수 있는 창구이기 때문이다.

현재 국내 대학 교수들의 창업은 전공 분야를 가리지 않고 과거보다 많이 활성화되었다. 그간 바이오 분야 위주에서 인공지능, 로봇, 반도체 등으로 다양해졌고 최근에는 인문·예체능 분야 창업 사례도 적지 않다. 최근 3년 동안 987개의 교수 창업이 이루어졌다.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에 의해 원천기술의 상용화 속도가 빨라지고 풍부한 벤처투자 자금 등 창업환경이 개선된 결과다.

대학별로 보면 지난해까지 최근 5년간 서울대는 81개의 교수 창업으로 제일 많은 성과를 냈고, 다음은 한양대(60개), 성균관대(53개), UNIST(52개), 연세대(50개), 충북대(41개), 강원대(38개), 고려대(37개), KAIST(34개), 충남대(33개) 등의 순이었다. 이들 교수창업 선도대학들의 특징은 단순히 창업 지원책을 마련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스타트업에서 스케일업 단계까지 모든 분야를 대학이 함께 기획하고 있다. 서울대는 최대 두 개 회사까지 겸직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고, 한양대는 '창업 연구년' 제도를 도입하여 기술창업 목적으로 수업을 면제해주고 있으며, KAIST 교수는 최대 6년까지 창업 휴직을 할 수 있다. GIST는 창업 실적을 교원 평가의 60%까지 반영하고 있다.

반면 스탠퍼드대, UC버클리, 존스홉킨스대 등 창업을 이끌어온 미국의 명문 대학들은 우리와 달리 교수 창업을 위한 별도의 지원제도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기업 상임직 겸직도 허용하지 않는다. 거기다 교내 연구시설과 장비를 창업에 활용할 수도 없다. 이것을 보면 교수 창업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자신의 이론을 검증하여 실용화하려는 학문적 열정과 자신의 삶의 지평을 확대하려는 도전정신이다.
권 업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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