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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일현 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 영남일보 DB |
전국 주요 의대와 최상위권 대학이 신입생을 '구구단 암기 속도'로 선발한다고 발표하면 사교육 시장이 문을 닫을까? 그렇지 않다. 전국의 크고 작은 학원은 '구구단 광속으로 암기하는 비법 최초 공개'라는 현수막을 재빨리 내걸 것이다.
우리는 왜 대학입시에 목숨을 거는가? 학력과 학벌에 의한 차별대우, 임금 격차 등이 현실로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학부모는 대학 진학을 '취업에 유리한 출발선 확보'로 생각한다. 대학 졸업 후 '구직달리기'에서 SKY 등 명문대 출신은 출발선보다 한참 앞에서 뛰고, 중·하위권대 출신은 훨씬 뒤에서 달려야 하므로, 대학 시절 피나는 노력으로 실력을 갖춰도 앞서 출발하는 상대를 따라잡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대학 서열이 무의미해지는 혁명적 상황 반전이 없다면 절대평가를 도입하든 상대평가를 도입하든, 문제가 쉽든 어렵든 명문대와 의대 입학을 위한 사교육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입학 연도, 미국과 유럽은 졸업 연도를 중시한다. 대학 동문회에 가면 처음 만난 사람끼리는 학과와 학번을 대며 자신을 소개한다. 위계를 중시하는 우리에게 입학 연도는 여러 면에서 편리하다. 나이와 선후배 관계를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입학 연도를 중시하는 곳은 입학이 어렵지 졸업은 그렇게 힘들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번 전력 질주로 그 집단에 들어가기만 하면, 동문이 누리는 사회적 평판과 특권, 눈에 보이지 않는 각종 혜택을 향유할 수 있다.
학벌주의가 힘을 발휘하는 곳에서는 특정 대학 졸업장이 지위와 보상 획득의 결정적인 수단으로 통용된다. 이런 곳에서는 특정 고교나 대학 출신자가 지배집단 안에서 카르텔을 형성, 기득권 유지를 영속화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학생은 그 카르텔에 진입하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사생결단의 경쟁에 내몰린다. 학벌주의는 학력주의와 함께 권력 재생산의 중요한 기제가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학력과 학벌을 무시할 수는 없다. 높은 경쟁을 통해 획득한 학력과 특정 대학 졸업장이 어느 정도까지는 객관적인 능력 인정의 잣대로 작용한다. 도가 지나치면 사회 발전과 통합을 가로막는다. 사교육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떤 교육개혁도 소용없게 만드는 뿌리 깊은 학벌주의와 학력주의를 극복할 실효성 있는 해법이 먼저 나와야 한다.
이제 '개천에서 용 날 수 없다'는 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다. 농어촌 출신이나 저소득 근로자 자녀가 명문대에 입학하기란 정말 어렵다. 고급관료, 교수, 의사, 법조인, 기업 고위직 인사 또는 고소득층 자녀의 명문대 입학률이 해마다 높아진다.
무엇을 제대로 예측할 수 없어 불확실성이 지배적인 분위기로 자리 잡을 때, 변칙과 편법, 불법과 탈법이 활개 친다. 현재 사교육 시장은 수험생과 학부모의 불안 심리와 조급성, 교육 정책의 불확실성, 교육을 통한 계층이동 가능성에 대한 맹목적 신뢰 등을 생존의 자양분으로 삼고 있다.
교육 문제가 정쟁의 대상이 돼서는 안 된다. 정당과 정파, 진보와 보수를 초월한 범국민적 기구를 만들어 교육 격차 해소 방안과 공교육 경쟁력 강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균등한 기회 보장, 위력이 여전한 명문대 중심의 일자리 경쟁, 직군 간의 지나친 임금 불균형 등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계층이동 사다리의 복원과 불평등 해소, 사교육으로부터의 해방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윤일현<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

이효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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