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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가 머물며 시 청포도를 썼다고 알려진 경주 남산 옥룡암 내의 삼소헌. |
◆경주 진면목을 보려거든
경주박물관장을 두 번 지낸 소헌 정양모 선생께서 경주를 알고 싶으면 에밀레 종소리를 들어보고 진평왕릉과 장항리 절터에 가 보라고 했다. 에밀레 종소리는 언제 들어봐도 긴 여운이 가슴을 울리지만 하고많은 경주 유적 가운데 왜 진평왕릉과 폐사지 장항사지를 꼽았을까.
에밀레종은 성덕대왕신종인데 8세기 통일신라의 국력이 총동원돼 만들어진 신라문화의 정수로 700여 년을 봉덕사에 걸려 있다가 봉덕사가 수몰되자 조선초 봉황대 옆에 종각을 짓고 읍성 남문 종으로 사용했다. 높이 3.66m 무게가 18.9t이니 전란에도 훔쳐 갈 수 없었고 경주 유일의 신라종이다. 청아한 종소리는 서방정토의 게송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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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들에 있는 진평왕릉. |
진평왕릉은 명활산성 아래 숲머리 보문들에 있는 평지 능이다. 왕을 보필하는 문인석과 무인석, 악귀를 막아주는 12지신도 없고 이곳은 제왕이 잠든 신성한 곳이니 함부로 묘역을 더럽히지 말라는 엄숙함도 없다. 그 멋진 왕릉 도래솔이 이곳에는 엉성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무엇인가 범접할 수 없는 기품과 고귀함이 있다. 통일 왕업을 딸과 외손자(선덕여왕·무열왕)에게 넘겨주고 백성 속으로 들어가 노니는 듯, 늙어 비뚤어진 왕버들 고목마다 푸근함이 있고 수수함이 주는 힘은 천년을 넉넉하게 했다. 40여 기 신라왕릉 가운데 가장 고즈넉하고 멀리 낭산 위에 잠들어 있는 딸 선덕여왕릉과 황복사지 3층탑이 눈에 들어온다. 가장 신라다운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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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리 동서 5층석탑과 연화대좌. 〈문화재청 제공〉 |
장항사지는 토함산 동남쪽 산허리의 깊은 산중에 있다. 그 옛날 우리 조상은 무엇을 그리 희구해 이 깜깜한 오지에 절집을 지어 부처를 모셨는지. 계곡 위 좁은 절터에 동서 오층탑이 나란히 서 있는데 서5층탑은 복원돼 국보가 됐고 동탑은 지붕돌만 덩그러니 포개져 있다. 금당터 부처는 집을 나가 박물관으로 갔고 깨어진 연화대좌만 쓸쓸히 절터를 지키고 있는, 들풀 속에 폐허가 된 장항사지의 처연한 아름다움은 허무적멸 그대로이다. 몸돌의 문비 조각과 정교한 해태상, 금강역사의 위엄이 보여주는 신라 융성기의 자부심, 호국불국토의 간절한 기구(祈求)가 천년 비바람에 허물어졌지만 한때는 이곳이 화려한 미타찰임을 말해주고 있다. 적막과 바람소리가 전설을 들려주지만 그래도 범부의 눈에 장항사지는 들을(聽) 폐사지, 감은사지는 볼(見) 폐사지 같다.
◆옥룡암·이육사·청포도
경주 남산의 북쪽 자락에 있는 옥룡암에서 이육사는 두 번이나 요양생활을 했다. 탑골 마애불상군으로 알려진 옥룡암은 상서장에서 천년숲정원으로 가는 길에 있다. 1920년 16세에 고향 안동 원촌마을을 떠나 대구 남산동으로 이사한 육사는 청년시절을 대구에서 보내면서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투척사건에 연루돼 대구형무소에 2년을 복역하는 등 그동안 피폐해진 몸을 회복하고자 경주로 내려온다.
1936년 7월 포항의 친지 포도원에 잠시 거주하다가 8월부터 남산 옥룡암에 머무는데 이때 경주 최부자 집안과 경주고교를 설립한 수봉 이규인 선생의 도움을 받는다. 옥룡암에서 육사는 동해 포도원에서 착상한 시 청포도의 초고를 다듬고 있었다고 한다. 수개월 동안 옥룡암에 머물면서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린 탑골 부처바위 아래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는 님을 기다리며 명작 청포도를 완성했으리라. 이듬해 서울로 올라간 육사는 문장지에 청포도를 발표해 수많은 조선 청춘의 가슴에 뜨거운 불을 지폈다.
1942년 7월 신석초와 함께 다시 경주로 내려와 기계면의 지인 집에 머물다가 옥룡암으로 와서 요양을 한다. 이듬해 북경으로 건너가서 국내로 무기 반입을 도모하다가 발각돼 1944년 1월 북경형무소에서 40세의 나이로 순국한다. 그가 머문 곳으로 알려진 옥룡암 삼소헌(三笑軒)은 세월의 무게를 견딜 수 없어 곧 무너질 듯 위태하다. 이육사와 청포도의 산실이라는 작은 안내문 하나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집경전 옛터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태종은 부왕의 어진(초상화)을 주요 다섯 고을에 봉안하고 의례를 지내도록 했고 세종은 전각에 이름을 지어 내렸다. 경주 집경전, 전주 경기전, 평양 영숭전, 영흥 춘원전, 개성 목청전이다. 경사가 모인다는 집경전은 경주객사 동경관 북편에 세워졌고 건국 시조를 모신 곳이니 전패가 있는 객사나 향교 대성전보다 격이 높아 경주에서 으뜸이었다.
임진란이 발발하여 왜군이 파죽지세로 쳐들어오자 집경전 참봉이던 안동선비 정사성은 태조 어진을 양동서원으로 옮겼다가 다시 안동 도산서원 뒤 산골짜기 백동서당으로 이안했다. 이때 안동선비들이 자발적으로 어진을 지켰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왜군이 안동으로 쳐들어오자 어진을 강릉객사로 옮겼다가 1631년 인조 때 화재로 소실됐고 경주 집경전도 아름다운 석조물만 남겨둔 채 임진병화로 불탔다.
그 후 경주유림에서 수차례 집경전 복원 상소를 올렸지만 이미 감영이 대구로 옮겨갔고 경주부윤이 적극성을 보이지 않아 복원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1798년 정조는 경주유림을 달래기 위해 '집경전구기(集慶殿舊基)'란 글을 내려 집경전 옛터에 비각을 짓고 홍살문을 세웠다. 해서체의 전아한 필치에 어필이라는 두 글자가 있어 정조의 친필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비석만 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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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암곡동 무장사 비편, 1760년 이계 홍양호, 1817년 추사 김정희에 의해 비석 조각이 발견됐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경주부윤 홍양호
조선왕조 500년 동안 경주부윤을 지낸 이는 339명이다. 그중 가장 많이 고적을 답사하고 곳곳에 족적을 남긴 이는 영조 때 경주부윤을 지냈던 이계 홍양호(1724~1802)다. 훗날 청나라 사행을 두 번이나 다녀왔고 조선의 문예 부흥기 정조시대에 양관(홍문관·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인물로 학문·문장·서예의 대가이다. 1760년 36세의 한창나이에 경주부윤으로 내려와 풍부한 지식과 안목을 바탕으로 경주를 사랑했다.
풍산홍씨인 이 집안은 문장과 서예에 뛰어난 인물이 많이 나왔다. 경상감사를 지낸 모당 홍이상의 손자 홍주원이 영창대군의 누이 정명공주와 혼인하여 일곱 아들을 낳아 그 후손이 영·정조시대에 현달하게 되는데, 첫째 후손이 혜경궁홍씨와 홍봉환·홍인환, 둘째 후손이 정조초기 세도가 홍국영, 막내 후손이 홍양호이다. 조선 여류서예가의 최고로 알려진 정명공주가 어머니 인목대비와 함께 서궁에 유폐됐을 때 쓴 '화정(華政)'이란 글씨는 대단한 명작이다.
이계는 등과 8년 만에 경주부윤을 보임 받아 옥산서원에서 유생의 글짓기 대회를 열고, 임진란 때 왜적과 싸워 목숨을 잃은 경주선비들의 공적을 찾아내 정려비명을 지어 위로했다. 안강의 이팽수, 양동의 손종로, 강동의 권복흥, 산대의 권사악이 그들이다. 여러 선비 문집에 서문을 쓰고 양북의 노일당, 보문의 남덕정 기문을 지었다. 손곡의 모고암, 내남의 흠흠당, 교동의 사마소 편액은 그의 필적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뛰어난 공적은 암곡의 무장사 비편 발견이다. 삼국이 통일됐으니 이제 병기와 투구를 땅에 묻는다는 전설이 담긴 절이다. 그동안 탁본으로만 전해오던 무장사 비석을 이계가 인근 농가에 사용하던 맷돌이 비석의 파편임을 알아보고 찾아내 기록으로 남겼다. 왕희지체로 된 이 금석문의 보물은 그 후 추사 김정희가 추가로 비편을 발견한다. 이계는 문무왕릉비. 태종무열왕릉비, 김각묘비에 대해서도 귀중한 글을 남겼다.
◆무녀도·완화삼·나그네
형산강 상류인 경주 서천이 금장에서 암벽을 만나 큰 소(沼)를 이루는데 옛날부터 예기소라 불렀다. 강변 성건동에 살고 있던 23세의 문학청년 김동리는 어릴 적부터 들어왔던 예기소 전설을 모티브로 단편소설 무녀도를 완성한다. 고도 경주에 들어온 교회, 무당 모화, 기독교인 된 아들 욱이, 벙어리 딸 낭이를 통해 기독교 세계와 전통 샤머니즘이 충돌하는 1930년대 사회적 갈등을 경주를 배경으로 빼어나게 그렸다. 무당 모화의 칼에 아들 욱이는 죽고 모화 또한 부잣집 며느리의 혼을 건지려다 예기소 푸른 물속으로 사라지는, 전통과 근대의 아픔을 미학적으로 묘사한 현대소설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최근 경주의 새로운 명소 황리단길도 옛적에는 살풀이굿 대나무가 서너 집마다 서 있는 무당골목이었고 그 끝에는 큰 교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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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 |
1942년 초여름 월정사에서 하산한 22세 조지훈은 고향 영양 주실로 가려던 생각을 바꾸고 박목월을 찾아 경주 모량으로 내려온다. 3년 전 문장지를 통해 함께 등단한 목월과 지훈은 죽이 맞았고 일주일을 경주에서 함께하면서 배반들 밀밭길 따라 불국사로, 반월성과 포석정을 거닐며 망국의 슬픔을, 형산강 건너 독락당까지 경주 농주에 취해 노래를 불렀다. 지훈은 고향으로 돌아가 눈이 큰 친구의 따뜻한 우정과 고마움에 시 완화삼을 지어 보낸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 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라 했고, 목월은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로 화답했다. 완화삼의 부제는 '목월에게'이고, 목월은 지훈을 "그는 해방될 때까지 내가 사귄 유일한 시우"라 했다. 암울했던 시기에 경주를 인연으로 영원한 우리들의 시 두 편이 그렇게 탄생했다.
역사는 그저 존재할 뿐, 애써 아는 척하는 것이 오히려 방해되고 흠이 되지만 역사는 우리들의 이야기이고, 옛사람들은 먼저 산 우리들이기에 따뜻한 옛이야기를 가슴에 담는다.
여행작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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