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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
'행간을 읽는다'는 말이 있다. 글이나 말에 감춰진 속내를 헤아려 낸다는 뜻이다. 심오한 은유(隱喩)에 대한 해석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결혼 적령기의 여자가 "난 문화생활 누리며 윤택하게 살고 싶어"라고 말하면 배우자의 경제력을 중시하겠다는 암시다. 대차대조표와 손익계산서 같은 기본적인 재무제표만으로 기업의 성장성과 현금 흐름을 유추하는 내공도 일종의 '행간 읽기'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가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스포트라이트는 라파엘 그로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을 향한다. 그의 말에서 '행간의 의미'를 찾아보자. 그로시 사무총장은 "IAEA는 오염수 방류를 권장하는 것도 승인하는 것도 아니다. 해양 방류는 일본 정부의 결정"이라고 말했다. '해양 방류가 최상의 방법은 아니다'는 함의가 숨어있는 듯하다. 'IAEA는 해양 방류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실제 IAEA는 최종보고서 첫 페이지에 '보고서를 활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어떤 결과에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문구를 넣었다. 그로시의 내밀한 의중을 연결할 만한 의미심장한 대목이 있다. "일본은 처음부터 IAEA 실무팀의 권한을 제한했고 다른 처리 방안을 평가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마오닝 중국 외교부 대변인).
IAEA는 "국제안전기준 부합"이란 결론을 내려 사실상 일본 정부에 오염수 방류 면허증을 발급했다. 하지만 안전성 확신엔 몇 가지 필요조건이 따른다. 첫째, IAEA의 중립성과 검증의 완벽성이다. IAEA 분담금으로 따져본 힘의 기울기는 어떨까. 분담금 1·2·3위는 미국·중국·일본이다. 1·3위 연합이 2위보다 우세한 구도다.
IAEA는 원자력의 안전과 평화적 사용을 촉진하고 감시·감독하는 기관이다. 해양 환경과 핵 오염물의 영향 평가는 주업이 아니다. 그린피스나 국제해사기구(IMO)가 IAEA와 함께 공동 검증했더라면 국제적 신뢰는 훨씬 높아지지 않았을까. 일본이 IAEA에만 검증을 요청한 저의가 궁금하다. 완벽성도 아쉽다. IAEA는 2차·3차 샘플을 분석하지 않은 채 최종보고서를 내놨고, 오염수 처리 결과만 평가했을 뿐 ALPS(다핵종제거설비) 성능을 검증하지 않았다.
둘째,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의 투명성이다. 기시다 일본 총리는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높은 투명성을 갖고 국내외에 오염수 안전성을 정중히 설명하겠다"고 했다. 과학적 근거? 높은 투명성? 그렇다면 시료 채취는 왜 거부하나. 인접국과의 공동조사는 왜 받아들이지 않나. 이율배반이자 자가당착 아닌가.
일본 원자력규제위원회는 지난주 해양방류 설비 합격증을 도쿄전력에 교부함으로써 방류 준비를 마쳤다. 방류 강행의 '행간의 의미'는 뭘까. 한국 국민의 반대(국민 84%) 따윈 아랑곳 않겠다는 독선과 오만이 읽힌다. 오염수 방류는 향후 30년 넘게 이어진다. 도쿄전력이 오염수 처리 기준을 지속적으로 준수하는 게 관건이다. 우리 정부 관계자와 민간 전문가가 후쿠시마에 상주해서라도 항구적 감시체계를 가동해야 한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이를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은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대해 100년이 다 되도록 사과하지 않았고, 한국의 G8 편입에 가장 강하게 반대한다. 해양 방류는 수증기 방출 등 오염수의 다른 처리 방법보다 비용이 저렴하다. 우리만 일본에 선의를 베풀 이유가 없다. 원전 오염수 방류에 대한 이중삼중의 안전장치 요구는 인접국으로서 주권국가로서 당연한 권리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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