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따라 이야기 따라 영양에 취하다 .3] 주실마을과 두들마을…일월산 정기 품은 문한의 땅 '주실'·지사의 요람 '두들'

  • 류혜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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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7-27 07:37  |  수정 2023-07-27 07:37  |  발행일 2023-07-27 제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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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월산 아래 호리병 같은 골짜기에 자리 잡은 영양 주실마을. 주실마을은 한양조씨 세거지로 조지훈 등 많은 후손들이 문집과 유고를 남겨 문한의 땅으로 성장했다.
산은 거대하게 일어나 하늘에 닿는 두 개의 봉우리를 세웠다. 동쪽에는 해의 봉우리, 서쪽에는 달의 봉우리, 그래서 산은 해와 달의 영악(靈嶽)인 일월산(日月山)이다. 산의 깊은 심장으로부터 샘이 솟아나 이윽고 큰 물줄기를 이루니 바로 반변천(半邊川)이다. 천은 일월산의 남쪽 골짜기에서 장군천과 만나 영양의 한가운데를 굽이굽이 흐르다가 군의 남쪽에서 화매천과 하나 되어 낙동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 이중환은 일월산을 '인재를 키우는데 적합한 산수'라고 했는데 그 공덕에 대해 소설가 이문열이 쓴 송사(頌辭)가 일월산 정상에 새겨져 있다. '해와 달을 아울러 품은 넉넉한 자락은 그윽한 옛 고을 고은(古隱)을 길러내고 삼엄한 기상은 거기 깃들어 사는 이들에게 매운 뜻을 일깨웠다.'

조지훈의 고향 주실마을

조전이 첫 정착한 한양조씨 세거지
집안 후손 63명이 문집·유고 남겨
월록서당·만곡정사·학파헌 등 남아

이문열의 고향 두들마을

이시명이 개척한 재령이씨 집성촌
학자·의병장·독립운동가 많이 배출
석천서당·석계고택·석간고택 현존


◆문한의 땅 주실마을

일월산 아래 호리병 같은 골짜기의 마을이 있다. 마을 앞으로는 문필봉을 마주하고 마을 뒤로는 일월산에서 흘러온 세 개의 완만한 봉우리가 물 위에 뜬 연꽃으로 펼쳐진다. 연꽃 같은 봉우리 사이로 장군천이 흘러 마을의 한가운데를 적시니 마을의 이름은 주곡(注谷) 또는 주실(注室)이라 한다. 주곡은 물이 쏟아지는 골짜기, 이는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땅에 원래 살던 사람들은 주씨(朱氏)라 한다. 인조 8년인 1630년경 영양읍 원당리에 살던 호은(壺隱) 조전(趙佺)이 처음 들어와 정착한 뒤 한양조씨 세거지가 되었다. 실학자들과 교류해 일찍 개화했고, 일제 강점기에는 온 마을 사람들이 똘똘 뭉쳐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던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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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 때의 유학자 만곡 조술도를 위해 제자들이 세운 만곡정사.
입향조인 조전은 자식들의 교육에 많은 신경을 썼고 아들과 증손자 등이 연이어 급제하면서 주실에 한양조씨의 학문적 기틀을 다지게 된다. 특히 조전의 증손자인 옥천(玉川) 조덕린(趙德린)은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영남 남인 질곡의 상징이다. 그는 영조 1년에 당쟁의 폐해를 논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되었고, 영조 12년에는 서원의 난립을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노론의 탄핵을 받고 다시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유배지로 향하던 길, 그는 강진에서 세상을 떠났다. 조덕린의 죽음은 후손들에게 상당한 고통을 안겨 주었다. 효성이 지극했던 아들 조희당(趙喜堂)은 출사하지 않고 고향에서 학문을 닦으며 후손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여생을 보냈다. 조덕린의 학문은 손자인 월하(月下) 조운도(趙運道), 마암(磨巖) 조진도(趙進道), 만곡(晩谷) 조술도(趙述道) 형제가 계승했다. 형제들은 모두 향리에서 학문에 정진하여 선비의 사표로 이름을 떨쳤다.

마을의 한가운데 '호은종택(壺隱宗宅)'이 자리한다. 사람들은 '조박사 집'이라 부른다. 1920년 12월3일 호은종택 중앙의 가장 좋은 방에서 시인 조지훈이 태어났다. 생가의 뒤편에는 시인이 유년시절을 보냈던 본가가 있다. 본가는 지훈 일가가 떠난 이후 상당 기간 폐옥으로 남아 있던 것을 2010년에 복원했다. 주실의 동쪽에는 월록서당이 있다. '일월산 자락의 서당'이라는 뜻이다. 조운도의 발의로 건립된 것으로 영양 최초의 서당인 영산서당이 서원으로 승격된 이후 처음 세워진 서당이었다. 주곡리의 한양조씨, 도곡리의 함양오씨(咸陽吳氏), 가곡리의 야성정씨(野性鄭氏)가 힘을 모아 영조 49년인 1773년에 건립했다. 현판 글씨는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썼으며 기문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이 썼다. 조지훈은 월록서당에서 한학과 조선어, 수신, 역사, 도서 등을 배웠다. 호은종택과 월록서당 사이에 '지훈문학관'이 있다. 정면 열두 칸의 긴 한옥 건물로 2007년 5월 개관했다. 현판은 부인 김난희 여사가 쓴 것이라 한다. 문학관 뒤 산자락을 타고 산책로가 이어진다. 길섶에는 시비들이 늘어서 있다. 산책로는 세 개의 봉우리 중 가운데 봉우리의 기슭에 닿는다. 그곳에는 지훈 시공원이 있다. '승무' '낙화' '다부원에서' 등 27개의 시비와 청동조각상들이 어우러져 있고 그 가운데 시인의 동상이 서 있다.

주실의 서쪽 천변에는 조술도의 정자인 만곡정사(晩谷精舍)가 있다. 만곡정사의 현판 역시 78세의 노구로 주실을 찾아왔던 채제공이 썼다. 마을 중심부에는 조운도의 손자인 조성복(趙星復)의 정자 학파헌(鶴坡軒)이 소박하게 자리한다. 조성복은 직접 농사를 지으며 가학을 이어나간 인물로 학덕을 고루 갖춘 선비였다고 한다. 학파헌 현판은 정약용의 글씨다. 평생 은거한 조성복에 대해 정약용은 그가 시대를 잘못 만났기 때문이라며 한탄했다. 가문에 홍패(대과급제증서)가 넉 장, 백패(소과급제증서)는 아홉 장에 불과했다. 그러나 63인의 후손들이 문집과 유고를 남김으로써 주실은 문한(文翰)의 땅으로 성장했다. 일제강점기 친일 문학과 사상 전환의 강요에 붓을 꺾고 지훈이 향한 곳도 고향 주실이었다.

마을의 동쪽 끝, 장군천이 흘러나가 큰길과 만나는 곳에 '주실숲'이 울창하다. 울창하여 어둑한 숲 속에 지훈의 시비 '빛을 찾아가는 길'이 있다. '돌 뿌리 가시밭에 다친 발길이/ 아물어 꽃잎에 스치는 날에는/ 푸나무에 열리는 과일을 따며/ 춤과 노래도 가꾸어보자.' (빛을 찾아가는 길 中). 숲의 입구에는 어느 서슬 퍼런 벼랑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듯한 비정형의 석비가 서 있다. 시선과 마주하는 반듯한 면에 '주실마을'이라 새겨진 단정한 글씨가 벼랑의 하얀 속살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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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두들마을은 화매천변 언덕진 땅에 위치한다. 석계 이시명과 그의 부인 장계향이 이곳에 터를 잡은 뒤 많은 학자와 독립운동가가 배출됐다.
◆학자·의사의 요람 두들마을

영양군의 남쪽 화매천변에 두들마을이 있다. 동쪽에는 병암산(屛岩山)이 병풍으로 서 있고 뒤로는 광로산(匡蘆山)이 일월산의 낙맥으로 내려서며 초야를 이루는 언덕진 땅. 그래서 언덕을 뜻하는 우리말로 '두들'이라 했다. '화매(花梅)'는 물이 흘러 주위의 황무지를 적셔 주니 그 땅에 여러 풀꽃들이 무성하게 자라났다고 해서 생겨난 이름이라고 한다. 두들마을을 개척한 이는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이다. 그는 인조 18년인 1640년 병자호란의 국치를 부끄럽게 여겨 이곳으로 들어왔다. 그의 부인은 안동장씨 장계향으로 최초의 한글 조리서인 '음식디미방'을 집필한 여중군자로 이름 높다. 석계 부부는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 도토리를 얻을 수 있는 상수리나무를 많이 심었고 왜란과 호란으로 궁핍해진 이웃들에게 도토리 죽을 끓여 나누었다고 전한다. 두들마을에는 지금도 상수리나무가 많다.

석계의 선업을 이은 이는 넷째아들 항재(恒齋) 이숭일(李嵩逸)이다. 이후 후손들이 더해져 두들마을은 재령이씨(載寧李氏) 집성촌으로 이어져 왔다. 마을에서는 많은 학자와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는데, 조선시대 퇴계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킨 갈암 이현일과 밀암 이재, 근세에 의병대장을 지낸 나산 이현규, 일제강점기 유림 대표로 파리장서사건에 서명한 운서 이돈호, 이명호, 이상호 등의 독립운동가와 항일 시인인 이병각, 이병철 등이 모두 두들 출신이다. 또한 두들은 소설가 이문열의 고향이다. 그는 항재의 12세손으로 그의 작품 곳곳에서 두들은 깊은 자부심으로 묘사된다. 넓고 위엄 있는 영지, 아름드리 참나무 오솔길, 느닷없는 충격으로 다가오는 덩그런 기와집 등. 이는 오늘 우리 앞에 펼쳐지는 두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마을에는 석계의 유적인 석천서당과 석계고택, 작가 이문열이 유년시절을 보냈다는 석간고택 등이 남아 있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선 음식디미방 체험관과 장계향 예절관 등이 커다랗게 자리하고 있다. 화매천변에는 수백 년을 넘긴 참나무 고목이 군락을 이룬다. 절벽에는 석계가 짓고 항재가 새겼다는 동대, 서대, 낙기대, 세심대 등의 글씨가 남아 있다. 이 중 낙기대와 세심대는 몸과 마음이 상쾌해져 배고픔을 잊고 마음을 씻을 수 있다는 뜻에서 이름이 지어졌다. 특히 낙기대는 30여 리 전방의 촌락과 산야를 내다볼 수 있는 곳으로 이곳에서 보릿고개로 힘든 주민들에게 구휼식량을 나누었다고 전한다. 정부인 안동장씨 시절부터 시작된 이러한 전통은 광복 직전까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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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음식 조리·다도 등을 직접 배울 수 있는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
마을의 가장 위쪽에는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다. 가장자리를 따라 조성돼 있는 산책로는 참나무 숲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광장을 '도토리공원'이라고도 한다. 이곳에서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무성한 상수리나무 이파리들이 단아한 한옥의 부드러운 용마루곡선을 쓰다듬는다. 이문열이 쓴 일월산에 대한 송사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세상이 평온하면 이 땅 가득 지혜와 영감의 향내를 피워 내다가도 나라가 치욕을 입으면 비분에 찬 은사(隱士)들의 수양산(首陽山)이 되거나 죽기로 맞서는 지사(志士)들의 마지막 베개와 무덤이 되었다. 이제 옛 고은은 문향(文鄕) 영양으로 자라 새로운 천년을 마주하고 섰으니…'.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영양군지. 한국학중앙연구원 누리집.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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