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직구 핵직구] 과거가 현재를 규정한다

  • 이재동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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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9-27  |  수정 2023-12-12 11:05  |  발행일 2023-09-27 제27면

[돌직구 핵직구] 과거가 현재를 규정한다
이재동 변호사

대학에 들어갔을 때 신입생들이 읽어야 할 필독도서 목록들이 있었는데 늘 빠지지 않는 책이 영국의 역사학자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였다. 그런데 이 책은 마르크스나 헤겔의 책들과 함께 검찰이 시국사범들을 검거하여 재판할 때 증거로 제시하는 책들 중 하나였다. 영화 '변호인'에서도 이 책을 쓴 E.H.카가 공산주의자인지를 두고 공방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역사를 과거에 일어났던 사실의 집적(集積)으로 보는 상식적인 역사관과는 달리 이 책에서는 역사는 사실을 선택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역사가의 가치관이 반영될 수밖에 없고 역사가의 가치관은 시대정신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므로 역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현재가 변함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역사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하고 있다.

관제 교과서로 고정된 역사를 배운 그 시대의 학생들에게 이런 상대적 역사관은 하나의 충격이었고 역사와 사회에 관하여 스스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기에 당시 권위주의 정권에서는 이를 의식화의 시작으로 보았던 것 같다.

우리가 학교에 다니고 배울 때는 반공(反共) 이념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우리 문학에서도 수많은 좌익이나 월북 작가들은 그 작품은 물론 이름까지도 바로 쓸 수 없었다. 국어 참고서에서는 시인 정지용을 '정xx'라 표기하였고 선생님이 은밀하게 정지용이라고 밝혔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시는 지용, 소설은 태준'이라는 말이 있었다지만, 정지용의 시나 이태준의 소설을 읽기는커녕 이름을 제대로 밝히지도 못했으니 우리 문학을 온전하게 알 수가 없었다.

반면에 적극적으로 친일행각을 벌였던 이광수나 최남선의 작품들은 자주 언급되고 교과서에도 실렸었다. 친일은 용서되었지만 좌익은 결코 용납될 수 없었다. 독립운동사에 있어서도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의 투쟁은 삭제되거나 축소되었다. 그러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를 이루고 소련이 붕괴되고 남북의 화해와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우리 현대사도 비로소 온전한 것이 되었다.

권력은 항상 역사를 건드리고 싶어 한다. 어느 역사학자가 역사는 죽은 과거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든 '현재에 살아있는 과거'를 연구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듯이 역사는 현재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현재를 이해하고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현 정부가 일제강점기 아래에서의 무장독립운동을 역사에서 축소하거나 폄훼하는 것은 주로 그것이 좌익에 의해서 일어난 일이기도 하고 또한 자유를 부르짖는 보수우익의 입장에서 중·러에 대항하는 한미일 동맹의 강화라는 명분에서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소련의 붕괴로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그 위협이 사라진 지가 이미 오래인데 느닷없이 반공을 내세우는 것도 참 뜬금없어 보인다. 과거를 바꾸려는 것은 시대 발전의 흐름을 거스르려고 하는 정권의 입장을 정당화하여 결국은 현재를 바꾸려는 것이다. 매카시즘의 광풍 아래에서 숨죽여 살아온 우리 세대에게는 그런 움직임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불길하게만 느껴진다.

임기가 정해진 민주정부에서 역사를 손보려는 무용한 시도를 할 것이 아니라 후세 역사가들이 이 시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를 두렵게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이재동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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