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로 가는 청정관광1번지 산소카페 청송 .13] 항일의병기념공원

  • 류혜숙 작가,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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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11-08 07:58  |  수정 2023-12-12 11:08  |  발행일 2023-11-08 제16면
항일의병 구국의 혼 숨쉬는 곳…'청송의진' 최후 격전지에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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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 부동면에서 주왕산면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위치한 항일의병기념공원에는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충혼탑과 함께 항일의병기념관, 강당, 동·서재, 사당이 갖춰져 있다.

청송 부동면에서 주왕산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화전등(花田嶝)'이라 부른다. 순우리말로는 '꽃밭고개'다. 봄이면 진달래가 흐드러져 고갯마루가 마치 꽃밭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과거 꽃 흐드러졌던 마루에 지금 항일의병기념공원이 들어서 있다. 청송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방방곡곡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던 모든 의병들을 추모하는 공간이다. 가장 안쪽에 사당이 자리한다. 독립유공자로 서훈이 추서된 전국의 의병 유공선열 2천701명 전원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입구에 탑이 높다. 이름을 알지 못하는 수십만의 그들, 다만 '의병'이라는 이름으로 죽은 그들을 기리는 탑이다. 구한말 항일 의병 활동으로 희생된 분은 약 15만명으로 추산된다.

보훈부 등록 청송의병 95명…기초지자체 중 최다
1996년 '적원일기' 발견 계기로 각종 기념사업
격전지 표지석 세우고 2011년 기념공원 만들어
충의사엔 서훈추서 전국 선열 2701명 위패 모셔
의병장 창의검·화승총·'불원복 태극기'도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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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순국한 선열들을 기리는 무명 의병용사 충혼탑.



◆항일의병기념공원

서쪽의 안동과 의성, 남쪽의 영천, 동쪽의 영덕과 통하는 길이 화전등 아래에서 하나 되어 고개를 넘는다. 어느 길에서 고개를 오르더라도 가장 먼저 또렷하게 보이는 것이 희디흰 '무명 의병용사 충혼탑'이다. 탑 너머로 의병의 깃발들이 휘날리고 한옥 형태의 여러 건물이 적요한 가운데 단정하게 들어서 있다. '의병기념관'은 항일의병의 효시인 임진왜란과 한말 갑오개혁으로부터 경술국치까지 의병사를 보여준다. 강당인 창의루(倡義樓)는 의병정신 선양을 위한 집회와 참관단체의 강의실로 쓰이고 있다. 동재는 인의예지재(仁義禮智齋), 서재는 효제충신재(孝弟忠信齋)로 의병 선열 유족회 사무실, 자료 연구실, 의병 관련 자료와 도서 열람실 등으로 사용되며 추모제 행사 시 대기실 등의 다양한 용도로 쓰인다. 그리고 2개의 명각대(名刻臺)가 있다. 8폭의 까만 오석판에 의병들의 이름이 빼곡히 새겨져 있다. 사당은 충의사(忠義祠)다. 나란히 봉안된 2천701개의 하얀 위패 앞에서 말을 잊는다.

국가보훈부 공훈록에 등록되어 있는 청송 의병은 95명, 전국의 기초 자치단체 중 가장 많은 인원이다. 청송의 의병 활동은 개인문집 등에 근거하여 많이 알려져 왔으나 오랫동안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1996년, '적원일기(赤猿日記)'라는 '청송의진'의 기록물이 발견되면서 당시 의병에 참여했던 선열들의 활동과 충의 정신이 비로소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 된다. '청송의진'은 청송에서 가장 먼저 창의한 의진으로 1896년 3월12일에 결성, 16일에 창의를 천명했다. 참여 인원의 면모나 전력, 활동 면에서 볼 때 한말 청송지역을 대표하는 의병진이다. '적원일기'는 청송의진이 결성되기 직전인 1896년 3월2일부터 본진의 활동이 종료되는 5월25일까지 85일간의 활동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1896년은 병신(丙申)년이다. 병(丙)은 붉은색(赤)을 뜻하고 신(申)은 원숭이(猿)를 뜻하니 적원일기는 곧 병신년일기와 같은 말이다. 이를 '적원(赤猿)'이라 표현한 것은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보며 혹 이 일기가 후세에 전해지지 못할까 염려하여 비어(秘語)를 쓴 것으로 추측된다. '적원일기' 발굴을 계기로 1997년 9월 청송의병선열유족회가 구성되었고 청송군에서는 청송의병을 기리는 각종 기념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2001년에는 화전등에, 2002년에는 감은리 등지에 항일 격전지 표지석이 세워졌다. 그리고 2011년 전국 항일 의병들을 추모하는 '항일의병기념공원'이 화전등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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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펄럭이는 깃발 뒤로 항일의병기념관이 보인다.

◆청송의진 최후의 격전지, 화전등

1895년 일제는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그리고 친일정권을 사주해 단발령과 복제개혁을 추진하는 등 조선의 국권을 탈취하려는 침략정책을 가속화해 나갔다. 위기의 시대였고, 전국에서는 의병투쟁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이에 청송의 유림에서는 청송의진(靑松義陣)의 결성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청송향교에 모인 유림 200여 명은 의진 결성을 결의하고 의병장으로 심성지를 추대했다. 당시 66세의 고령이었던 심성지는 향중(鄕中)의 뜻에 따라 청송의병장을 수임했다. 참모진으로는 중군장에 김대락(金大洛), 우익장에 남두희(南斗凞), 소모장에 서효신(徐孝信), 사병도총(司兵都摠)에 남승철(南昇喆) 등을 임명해 진용을 갖췄다. 청송의진은 청송도호부 객사인 운봉관에 지휘부를 두었으며 객사 앞 용전천 백사장에서 훈련에 들어감과 동시에 모량도감(募粮都監)을 설치해 군량미를 모았다.

청송의진은 창의 후 주변의 안동, 진보, 영양, 의성, 영덕 등의 의진, 그리고 경기도에서 남하한 김하락(金河洛)의 이천의진 등과 긴밀히 협조하면서 정보를 교환하거나 연합부대를 편성해 활동했다. 특히 청송, 이천, 의성 등 3진 의병부대가 연합하여 청송 안덕면 감은리에서 북진하던 일본군을 무찌른 일명 '감은리(甘隱里) 전투'는 값진 승리였다. 이후 고종의 의병 해산령으로 많은 의병부대가 자진 해산하게 된다. 청송의진도 감은리 전투 이후인 5월25일 본진을 해산했지만 실제로는 의진을 소규모로 분산해 유사시 서로 조응하는 것을 계책으로 삼았고, 면군 체제하에서 활동을 지속해 나갔다. 그러던 중 7월 하순 이천의진을 돕기 위해 출전 중 마평(馬坪, 청송군 부동면 상평리)의 화전등에서 관군의 기습을 받고 패전하고 말았다. 일명 '화전등전투(花田嶝戰鬪)'다. 패전 후 관군의 추격을 받던 청송의진은 각처를 전전하다가 끝내 해산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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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병기념관 내부에는 불원복 태극기 등 의병이 사용한 물품들이 전시돼 있다.

◆불원복, 머지않아 국권을 회복한다

항일의병기념공원 전시관에 '불원복태극기'가 전시되어 있다. 전남 광양, 구례, 보성 일대에서 의병투쟁을 벌인 고광순(高光洵) 의병장이 실제로 만들어 사용한 태극기다. 태극기로 바탕 위쪽 중앙에 붉은색 실로 불원복(不遠復)이라 수 놓여 있다. '머지않아 국권을 회복한다'는 의미다. 그의 선언대로 우리는 국권을 회복했고, 전투가 벌어졌던 화전등에서 이제 그들이 남긴 것들을 본다. 청송의진의 대장이었던 소류선생이 자신을 위로하고 부하들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마음에서 지은 '강병론(强兵論)'도 볼 수 있고, 안동의 김도현 의병장이 항상 지녔던 창의검(倡義劍)도 볼 수 있다. 의병들이 암호용으로 사용하던 신표와 1907년 1월부터 7월까지 전국의 의병활동 상황을 조사한 일제경찰의 조사표도 볼 수 있다.

'화승총'은 산남의진의 후봉장 서종락이 사용하던 것이다. 경술국치 이후 청송 자택의 담 밑에 묻었다가 해방 후 파내었다고 한다. '정자관'은 1906년 각 고을에서 포수와 민병을 모아 산남의진(山南義陳)을 조성하고 후봉장으로 활동했던 서종탁 선생이 사용했던 것이다. '영야음'은 '밤에 병영(兵營)에서 시를 읊음'이라는 뜻이다. 비오는 봄밤에 대장 심성지와 도총 남승철, 찬획 이문영, 서기 정진도, 심능훈, 심의식, 서효격, 참모 홍병태, 심능렬, 신동호 등이 진영에 모여앉아 답답하고 애처로운 마음과 함께 각오를 다지는 시를 한 수 씩 지어 읊은 것이다. 서기 심능훈은 이렇게 읊었다. '이겨도 이긴 것 같지 않으니 이긴 뒤에 이긴 것이오,/ 죽을 곳에 마땅히 죽으면 죽어도 산 것이로다.'

항일의병기념공원은 2022년 1월부터 경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서 위탁운영을 실시하고 있다. 그리고 2022년 8월부터 2023년 3월까지 새롭게 단장되어 3월14일 재개관했다. 전시관에서 화승권총을 직접 만져 볼 수 있다. 방아쇠를 당기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커다란 소리가 심장을 훑고 지나간다. 실감영상실도 있다. 깜깜한 공간 속에서 청송과 항일의병궐기와 항일의병공원의 이야기가 수많은 불빛으로 이어진다. 그 빛이 너무 많아 오히려 서늘하다. 공원 한쪽에는 전국 의병장들의 절명시가 전시되어 있다. 신돌석, 안중근 등 낯익은 이름들이 보인다. '탄환이 참으로 무정하도다/ 발목을 다쳐 나아갈 수가 없구나/ 차라리 심장에 맞았더라면/ 욕은 보지 않고 저 세상에 갈 것을.' 운강 이강년의 시다. 그는 국권회복을 보지 못한 채 1908년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호국보훈의 달인 6월, 그 첫째 날은 '의병의 날'이다.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이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음력 4월22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날이라 한다. 청송 항일의병기념공원에서는 매년 6월 1일 의병의 날에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행사를 열고 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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