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욱 큐레이터와 함께 '考古 go! go!'] 손암(巽菴) 정황의 그림 속 대구 달성 이야기

  • 김대욱 큐레이터 영남대박물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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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11-24 07:34  |  수정 2023-12-11 16:01  |  발행일 2023-11-24 제25면
겸재 솜씨 빼닮은 손자가 그린 18세기의 대구…서쪽 하늘에 드론 띄워 바라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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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년)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화가이자 문신이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었다고 하며 20세에 도화서 화원이 되었고 우리 지역 경산 하양의 현감(縣監)을 지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남종화법(南宗畵法)과 오파(吳派)와 같은 새로운 산수화 기법을 수용하고 시서화 일체 사상을 중시하던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독창적인 회화 세계를 열었다고 평가된다. 회화 기법상으로는 전통적 수묵화법이나 채색화의 맥을 이어받기도 했지만 자기 나름대로의 필묵법(筆墨法)을 개발하여 조선의 실제 자연을 담아낸 뛰어난 진경산수화를 개척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대표적인 그림은 인왕산의 둥근 바위 봉우리 형태를 새로운 기법으로 나타낸 '인왕제색도'를 비롯해 '금강전도' '통천문암도' 등이 아주 잘 알려져 있다.

할아버지의 진경산수화풍 이어
가로 49·세로 69㎝ '대구달성도'
신천·금호강·침산 위 가옥 비롯
대구읍성의 영남제일문·달서문
경상감영 선화당·달성 성벽 생생


필자가 근무하는 영남대학교박물관에는 겸재 정선의 손자인 손암(巽菴) 정황(鄭榥, 1735~1800년)이 그린 '대구달성'이라는 그림이 있다(그림 1). 정황은 정선의 손자라는 것 외에 구체적인 행적은 알려지지 않는데 18세기 후반에 주로 활동했으며 할아버지의 진경산수화풍을 그대로 이어받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번엔 대구달성도를 꼼꼼히 살펴보며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이 그림의 크기는 가로 49㎝, 세로 69㎝ 정도이며 오른쪽 위에는 '손암(巽菴)'이라는 낙관이 찍혀 있고 '대구달성(大丘達城)'이라는 제목을 붙였다(그림 2). 그림의 가운데에 대구읍성을 배치하고 그 아래쪽에 대구달성을 그렸는데 마치 서쪽 하늘에 드론을 띄워 바라본 18세기의 대구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림 속 저 멀리 동쪽에는 원근법을 잘 살려 연한 먹으로 대구 인근의 크고 작은 산을 그렸다. 대구읍성의 위에서 왼쪽으로 작은 천이 흘러 왼쪽의 큰 강에 합류되는데 이 작은 천은 현재의 '신천'이며 합류되는 강은 '금호강'이다. 이 금호강은 대구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로질러 낙동강에 합류된다. 신천과 금호강이 합류되는 지점의 아래쪽엔 침산이, 위쪽엔 연암산이 그려져 있는데 침산 위에는 작은 가옥이 한 채 그려져 있다(그림 3). 조선 전기 최고의 문장가였던 서거정이 침산의 저녁노을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침산만조'를 읊었다고 했는데 혹 이 작은 정자에 앉아 침산 노을을 바라보았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현재 이곳 침산 위에는 옛 정자는 볼 수 없으나 대구 시내를 한눈에 전망할 수 있도록 전망대인 침산정(砧山亭)이 세워져 있는데 옛날 이곳에 있던 그 정자도 혹시 침산정이 아니었을까….

이제 그림 중앙에 그려진 대구읍성(그림 4)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대구읍성은 1590년 일본 침략을 대비하기 위해 달성토성으로 축조하였던 것을 1736년 석축의 대구읍성으로 완성했는데 당시 성의 높이는 5m, 두께 8m, 둘레 2천700m였다. 1870년에는 대대적인 보수와 정비가 있었으나 1907년 철거된 후 지금은 그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다만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 성내동, 서문시장, 남문시장, 서문로 등 읍성과 관련한 지명만 남아있다.

이 그림에 보이는 읍성은 그 성벽이 잘 그려져 있고 성을 출입하는 시설도 확인된다. 저 멀리 보이는 성 위에 세워진 크고 높은 2층 기와 건물은 남문으로 알려진 '영남제일문'(그림 5)이고 아래쪽에 보이는 문은 '달서문'일 것이다. 성내에는 여러 가옥이 확인되며 그중 붉은 기둥의 단층 기와 건물은 현재의 경상감영 '선화당'으로 보인다. 성밖에도 일부 가옥이 그려져 있으며 성내와 성벽 주변으로 소나무를 비롯한 키 큰 나무를 단순하게 표현하였다. 조지 클레이튼 포크의 기록에 나타난 "집들은 대체로 규모가 있었고 대개 사각형으로 견고해 보였다. 거리는 무척 넓었고 주막이 많았다. 성벽 모퉁이와 성벽을 따라 누각이 있었고 서쪽 대문은 약간 피라미드 모양으로 위풍당당했다"라는 표현이 적절해 보이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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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욱 큐레이터 영남대박물관 학예연구원
시선을 좀 더 아래로 내리면 달성이 보인다. 대구 달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된 성곽으로 금호강과 신천이 감싼 평원에 다시 달서천이 휘감은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토루를 쌓은 것으로 안쪽 경사면은 6m 정도, 바깥쪽은 9m 이상이나 된다. '삼국사기' 점해왕 15년(261년) 2월 달벌성을 쌓고 나마(奈麻) 극종(克宗)으로 성주를 삼았다고 하는 달성 축조에 관한 문헌기록과 성벽 일부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조사의 결과를 토대로 이 지역 일대에 정치세력이 성장하면서 초기적 국가형태를 형성한 단계에서 축조되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정치세력 집단은 성의 서남쪽으로 연결된 구릉지대에 대형 고분을 많이 축조하였고(달성고분군이라 함) 금동관 등 그들의 지위를 상징하는 많은 유물을 소유하였기에 대구지역의 중심 집단이었음이 분명하다.

이 그림 속 달성(그림 6) 성벽 위에는 소나무를 비롯한 키 큰 나무가 빽빽이 자라있고 왼쪽에는 성문이 열려 있다. 앞쪽에 보이는 성벽은 아주 큰 경사를 이루는데 그 성벽 위에 세 명이 서 있다. 맨 앞에 오른팔을 든 사람은 이 모든 상황을 담아 그림을 그려주기를 주문하고 있는 듯하고 그 뒤에 선 사람이 이 그림을 그린 손암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그렇다면 맨 뒤에 선 키 작은 사람은 손암을 따라다니던 시동이었으리라.

달성의 오른쪽 밖으로는 달성에 비교해도 그 규모가 작지 않은 못(池)이 보인다. 대구읍성의 북문 밖에서 작은 장터로 시작한 '대구장'이 그 규모가 커지면서 성벽의 서쪽에 자리 잡고 '서문시장'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 서문시장은 1920년대부터 달성고분군의 봉토 흙을 옮겨와 당시 '천왕당지'라는 못을 메워 그 위에 자리 잡게 되었는데 달성 옆에 보이는 이 못이 그 천왕당지이지 않을까 궁금해진다.

김대욱 큐레이터 영남대박물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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