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옛 그림 속에 살고 있는 용들의 세계…위풍당당 그림속용처럼…갑진년 멋지게 날아봐 '龍'

  • 김남희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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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12-22 07:46  |  수정 2023-12-22 07:49  |  발행일 2023-12-22 제13면

그림3
작자 미상 '운룡도', 종이에 엷은 채색.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용은 십이지(十二支) 중 유일한 '상상의 동물'이다. 낙타 모양의 머리에 사슴의 뿔, 토끼의 눈, 소의 귀, 메기의 수염을 가졌고, 목덜미는 뱀, 배는 큰 조개, 잉어의 비늘, 매의 발톱, 호랑이의 주먹을 가졌다. 동물의 최고 유전자를 취합한 용은 인간에게 우상이 되었다. 조화를 부리는 여의주를 지닌 무소불위의 권력자로서, 상상의 동물임에도 신령스러운 영물(靈物)로 대접 받으며 설화와 전설의 지존이 되었다. 2024년 갑진년(甲辰年) '푸른 용의 해'를 맞아 옛 그림 속에 사는 용을 들여다본다.


인간이 만든 상상 속의 동물이지만
신령스러운 영물로 예부터 사랑받아

잉어가 용으로 변하는 어변성룡도
용문 통과하는 과정 거쳐 승천하듯
새해 여의주향해 용처럼 날아보길

◆아버지의 용과 아들의 용

용은 화가에게도 사랑받은 소재였다. 조선시대 초기 안견(安堅)의 '운룡도(雲龍圖)'를 비롯하여 석경(石敬)과 신잠(申潛), 후기의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와 낙서(駱西) 윤덕희(尹德熙·1685~1776) 부자,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1707~1769),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1806?) 등 많은 화가가 용 그림을 남겼다. 눈빛이 살아있는 '자화상'으로 유명한 조선 후기의 사대부 화가 윤두서. 그는 여러 장르에 능통했지만 동물 그림으로도 일가를 이루었다.

특히 말 그림과 용 그림은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극찬을 받았다. 다행히 용이 주인공이거나 용이 들어간 그림 몇 점이 남아 있다. 그중 부채에 그린 '운룡도'는 윤두서의 기량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용 그림이다. '운룡도'는 먹구름 사이로 홀연히 나타난 용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용은 머리와 목, 오른쪽 다리와 꼬리 부분만 구름 밖으로 드러냈다. 볼 양쪽으로 뻗은 수염 두 가닥이 일렁이는 가운데, 숱이 많은 긴 털이 뿔 사이로 휘날리고 있다. 그런데 눈썹과 입 주변의 털, 두 뿔과 다리, 꼬리의 털이 하얗다. 강조하듯이 흰색을 칠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머리에 초점을 맞춰 용의 신령스러움을 표현했다. 일종의 '용의 초상'이다. 왼쪽 하단에 예서로 '희룡행우(戱龍行雨)'라 적었다. '용이 구름을 희롱하여 비를 내리게 한다'라는 의미이다. 비워둔 하단에는 세차게 비가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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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정 '의룡도', 종이에 엷은 채색.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윤두서의 조형감각과 취향은 아들에게도 이어졌다. 장남으로 태어난 윤덕희는 아버지를 따라 화가의 길을 걸었다. 윤덕희도 아버지처럼 용 그림을 잘 그렸다. 아버지의 '격룡도(擊龍圖)'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한 '격룡도'에는 힘이 넘친다. 용과 무사가 대결하는 그림이다. 언덕에는 검을 든 무사가 있고, 아래쪽에서는 파도를 일으키며 용이 솟구쳐 오르는 중이다. 일전을 치르기 직전이다. '격룡도'는 당나라 말기의 여동빈(呂洞賓)이 용과 대적하는 광경이 내용이다. 도교를 대표하는 여덟 명의 신선 중 한 명인 여동빈은 400년 이상 세상을 떠돌며 스승에게 받은 검으로 악을 제거했다. '격룡도'에서 여동빈이 윗옷을 벗은 채 바지를 걷어 올렸다. 검을 쥔 오른팔을 높이 들고 왼손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전투 자세다. 용의 기세도 만만치 않다. 접은 몸을 펴면, 바로 가닿을 거리에 무사가 있다. 무사도 물러설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는다. 팽팽한 긴장감이 돈다. 선인과 영물의 대결이 흥미진진하다. 대결의 승자는, 예상하는 대로다.

◆슈퍼모델 같은 용과 반려동물 같은 용

용모가 아름답고 수려한, '슈퍼모델' 같은 용도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의 '운룡도'는 뛰어난 외모부터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운룡도'는 먹구름을 일으키며 위에서 하강하다가 중앙에 머리를 고정시킨 채 왼쪽으로 포즈를 취했다. '얼짱 각도'다. 동그랗게 뜬 눈과 빛을 뿜을 듯한 눈썹에 입을 벌려 포효하는 듯하다. 붉은 코 사이로 긴 수염은 위쪽과 아래로 휘어져 있고, 입 주위에는 뾰족한 수염이 갈기처럼 뻗었다. 솟아오른 뿔이 화려하고, 머리 쪽의 덥수룩한 털이 사자의 갈기처럼 휘날린다. 온 몸에 난 털이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부여한다. 겹겹이 비늘로 덮인 몸이 영롱하다. 날카로운 발톱은 무지갯빛을 띠며 찬란하다. 용의 날렵한 모습이 패션 화보처럼 담겨 있다. 용은 신비하거나 근엄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과 어우러지기도 한다.

심사정의 '의룡도(醫龍圖)'가 그렇다. 도인은 용맹한 동물과 친구가 된다. 신분을 막론하고 사람들을 포용한다. 도인 옆에 호랑이가 있다. 또 용과 교감을 나누며 희롱을 한다. 도인과 동물이 어울려 노는 놀이동산을 보는 것 같다. '의룡도'는 해학적이다. 보고 있으면 웃음이 절로 난다. 화가의 위트가 상상을 초월한다. 호랑이와 두 명의 도인, 변화무쌍한 힘의 소유자인 용, 천리를 달리는 말이 함께한 영웅들의 즐거운 한때다. 장소는 너럭바위에 잎이 무성한 나무 그늘 밑이다. 평화로운 전경이다. 너럭바위에 엎드린 말과 말에 기댄 채 편안하게 앉은 도인은 건너편에서 하강하는 용을 보고 있다. 그 옆에 한 도인이 용의 수염을 만진다. 도인 앞에는 차 그릇이 놓여 있다. 화면을 양분하여 왼쪽에는 신선의 세계를, 오른쪽에는 용의 영역을 만들었다. 용의 머리 쪽 털이 회오리치며 바람을 일으킨다. 동그란 눈동자가 순진하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여의주를 감싸고 있다. 커다란 몸을 구름에 숨기며 머리만 도인에게 쑥 내밀어 순한 표정을 짓는다. 구름에 싸인 용의 모습이 신비하다. 생의 깨달음을 구한 인간이나 동물은 경계가 없음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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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두서 '운룡도', 종이에 채색. 해남 녹우당 소장

◆민화에서 발견한 용의 조상

고구려 고분벽화에 영혼을 지켜주는 사신도 중 청룡은 동쪽에, 황룡은 중앙에 각각 자리 잡았다. 용은 영혼을 싣고 날개를 휘날리며 극락으로 들어가는 불사조이기도 했다. 불사조는 어디에 살고 있을까. 사람들은 하늘이 아니라 깊은 못이나 바다 속 용궁에 산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용의 조상은 물고기라는 뜻일까. 그런 모양이다. 불사조로 하늘과 바다에서 활개를 치는 용도 처음에는 물고기였다. 작품 '어변성룡도(魚變成龍圖)'가 이를 증명한다. '어변성룡도'는 잉어가 용으로 변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의 원천은 중국 황하강 상류에 사는 잉어 무리에 있다. 물을 거슬러 긴 여정 끝에 잉어들은 복숭아꽃이 필 시기가 되면 용문폭포에 모여든다. 수천 마리의 잉어가 힘을 다해 폭포 위를 뛰어오른다. 몇 겁이 흘러 폭포 위에 오른 잉어만이 용으로 승천한다. 잠룡(潛龍)이 큰물을 만나 등용문(登龍門)에 든 것이다.

등용문의 신화는 그림으로 그려져 곧잘 과거를 앞둔 수험생의 방에 걸렸다. 잉어가 용으로 변하는 '어변성룡도'와 잉어가 용문을 뛰어오르는 장면을 그린 '약리도(躍鯉圖)'가 대표적이다. 그런가 하면, 문자도(文字圖) 중 '충(忠)'자에 용이 등장한다. 문자도는 삼강오륜의 요체인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를 그린, 일종의 '그림문자'다. 이 '충자도(忠字圖)'는 머리가 용이고 하반신은 잉어이다. '짬짜면' 같은 조합이 재미있다. 상반신은 인간이고, 하반신은 물고기인 인어를 보는 것만 같다. 잉어 또한 과거급제의 뜻을 지녀, 용과 잉어는 환상의 궁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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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 (화가)

'충자도'는 바다를 상징하는 소라와 새우를 사이에 두고 태아처럼 웅크린 잉어의 입에서 거대한 용이 솟아오르는 내용이다. 노랑 바탕에 검은 눈동자가 익살스럽다. 먹 선으로 변화를 주지 않고 가지런히 수염과 갈기를 표현하였다. 네모 모양의 몸통에는 촘촘히 비늘이 박혀 있다. 몸통 사이로 발을 내밀고 있으며, 붉은 갈퀴가 솟아 용의 위력을 과시한다. 용머리 위에 사람을 배치한 것은 과거에 급제한 신하가 임금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뜻으로 보인다.

◆푸른 용처럼 비상하는 새해

용은 인간의 염원에 의해 탄생되었다. 수려한 외모와 만물의 조화를 부릴 수 있는 여의주를 부여받은 용은 인간의 구세주였다. 인간이 만든 용이지만 여의주는 그저 쥐여 준 것은 아니다. 용문을 통과한 사람만 가질 수 있다. 노력과 인내의 산물이다. 새해에는 여의주를 향해 용처럼 날아보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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