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추 거문고 이야기]〈1〉연재를 시작하며, 설중매와 가장 잘 어울리는 악기 거문고…맑은 기운 도는 성인군자 닮아

  • 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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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1-05  |  수정 2024-01-05 07:51  |  발행일 2024-01-05 제13면
매화와 눈으로 덮인 천지 포대기에 싼 거문고 메고 초옥 향해 걸어가는 선비 청아한 소리·아름다운 풍경 온갖 마음 다스리는 반려자 수많은 사연·이야기 담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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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문인 화가인 고람(古藍) 전기의 '매화초옥도'.

조선 성종 때 '악학궤범' 편찬을 주도한 용재 성현(1439~1504)은 음악에 능통했음은 물론, 차(茶)도 즐겼던 문인 풍류객이었다. 그는 특히 거문고에도 뛰어났는데, 그만이 그 묘법을 얻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는 조선시대 수필문학의 백미로 꼽힌다. 그에게 우의정을 지낸 아들 성세창(1481~1548)이 있었다.

기재(寄齋) 박동량(1569~1635)이 지은 '기재잡기(寄齋雜記)'에 전하는 이야기다.

성세창의 친한 친구 홍정(洪正)은 성세창과 서로 통하는 친구였다. 그가 정월 어느 눈 내린 날 밤에 친구가 생각나 성세창을 찾아갔다. 동원(東園) 별실 창 아래서 담소를 나누고 있던 중, 갑자기 어디선가 거문고 소리가 들려왔다.

창틈으로 가만히 내다보았더니 백발을 휘날리는 한 노인이 매화나무 밑에 눈을 쓸고 앉아 거문고를 타고 있었다. 그 손끝에서 청아한 소리가 울려 나오고 있었다. 노인은 세속 사람이 아닌 신선과 같은 모습이고, 거문고 소리 역시 너무나 맑고 아름다웠다. 그 모습을 가만히 살펴보던 성세창은 노인이 바로 자신의 아버지인 성현임을 알아보고, 자신의 부친이라고 말했다. 잠시 후 그 노인은 어느새 손님이 방에 있는 줄 알았는지, 서둘러 거문고를 거두고 들어갔다.

홍정은 뒷날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 없었던, 이 인상적인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글로 써서 남겨놓고 있다.

'그때 달빛이 밝아 대낮 같고 매화가 만개했는데, 백발은 바람에 날려 나부끼고 맑은 음향이 매화향기를 타고 흘렀다. 마치 신선이 내려온 듯, 문득 맑고 시원한 기운이 온몸에 가득함을 느꼈다. 용재 선생은 참으로 선풍도골(仙風道骨)의 풍류객이라 할 만하다.'

옛글 중 매우 인상 깊었던 내용으로, 기회 있을 때마다 떠올리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음력 정월이면 양력으로는 2월이나 3월일 것이니, 일찍 피는 매화는 꽃봉오리를 터뜨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눈 오는 날이면 말 그대로 설중매(雪中梅) 풍경이 펼쳐질 것이다.

설중매에 거문고보다 더 어울리는 악기가 있을까 싶다. 언젠가 나도 이와 같은 풍류를 누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매화와 눈으로 덮인 천지
포대기에 싼 거문고 메고
초옥 향해 걸어가는 선비

청아한 소리·아름다운 풍경
온갖 마음 다스리는 반려자
수많은 사연·이야기 담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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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초옥도' 중 거문고를 메고 가고 있는 인물 부분.

◆매화초옥도 이야기

그림에도 이와 비슷한 풍류가 떠오르는 작품이 있다. 매우 좋아하는 그림인데, 고람(古藍) 전기(1825~1854)의 '매화초옥도(梅花草屋圖)'이다.

'매화초옥도'는 눈 내린 날, 산속 초가 주위에 늘어선 매화나무에 흰 꽃이 만개한 풍경이다. 산봉우리마다 눈으로 덮여 있지만, 초봄인지 곳곳에는 새싹이 돋아나고 있다. 그리고 골짜기 따라 늘어선, 커다란 고목 매화나무마다 꽃을 활짝 피우고 있다. 매화는 흰 점을 무수하게 찍어 표현했는데, 마치 목화 꽃을 보는 듯하다. 맑은 기운이 감도는,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풍경이다.

매화와 눈으로 덮인 천지는 맑고 고요한데, 초옥 안에는 연둣빛 옷을 입은 한 남자가 밖을 내다보며 앉아 있다. 설중매 풍경을 감상하며 멋진 친구를 기다리고 있다. 초옥 아래에 있는, 눈 덮인 다리 위에는 붉은 도포를 입은 한 인물이 초옥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어깨에 뭔가를 메고 있다. 바로 포대기에 싼 거문고다.

설경 속 두 인물을 원색 옷으로 표현해 전체 풍경에 생동감을 더한다. 두 사람의 기분이 약간 들떠 있는 듯한 기운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림의 오른쪽 아래에는 '역매인형초옥적중(亦梅仁兄草屋笛中)'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역매 형이 초가 안에서 피리를 불고 있다'라는 뜻이다. '역매(亦梅)'는 오경석(1831~1879)의 아호다. 그가 초옥의 주인임을 말해준다. 그리고 거문고를 메고 그를 찾아가는 사람은 이 작품을 남긴 전기 자신이다.

역관(譯官)이자 서화가였던 오경석은 매화를 너무나 좋아한 '매화광'이었다. '역매'와 더불어 '야매(野梅)' '일매(逸梅)'를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그런 그에게 잘 어울리는 초옥이다.

전기는 추사 김정희에게 서화를 배웠다. 고람이라는 아호도 김정희가 그의 걸출한 재능을 아껴 지어준 것이다. 서른을 넘기지 못하고 요절한 전기는 당대의 걸출한 문인과 서화가들이 입을 모아 극찬한 천재 작가였다.

실제 상황을 담은 것으로 보이는 이 그림의 두 주인공이 이날 거문고와 함께한 시간이 어땠을까 상상해본다. 전기는 거문고를 매우 좋아했고, 또한 즐겨 연주했던 것 같다. 더할 수 없이 좋은 날, 마음 통하는 사람과 설중매의 분위기를 즐기는 자리에 거문고가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리라.

설중매가 피어난 날 거문고를 등장시킨 것에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거문고가 설중매에 어울리는 이유는 단순히 그 음색 때문만은 아니다. 거문고를 좋아한 전기는 거문고가 선비를 비롯한 당시 지식인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거문고는 선비들에게 사심과 욕심을 다스리는, 성인군자의 마음을 갖도록 하는 데 도움을 주는 반려로 여겼던 악기다. 그리고 매화는 맑은 마음, 성인의 마음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설중매에 가장 잘 어울리는 짝이 거문고이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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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거문고와 나

30여 년 전 늦은 봄날, 문경새재로 가는 길을 걷고 있었다. 반가운 악기 연주 소리가 들려왔다. 숲속 정자에서 누가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소리를 따라 20여 분 동안 가보았다. 그곳은 식당 겸 가게였고, 거기서 틀어놓은 가야금 카세트 테이프가 '연주자'였던 것. 김죽파의 가야금 산조 연주였는데, 당시는 거문고 소리와 가야금 소리를 구분하지도 못했다.

거문고에 대한 막연한 호감을 가지고 있다가 2001년 직장 동료들과 거문고 연주를 배우기 시작했다. 2년 정도 열심히 배우다가 가르치는 선생님이 교통사고를 당해 팔을 다치고 배우던 동료들도 사정이 생기면서 그만두게 되었다. 그 후 거문고는 먼지만 뒤집어쓴 채 방치되다가, 2014년부터 다시 거문고를 배우기 시작했다. 요즘도 거문고를 수시로 연주하고 있다. 그리고 거문고에 관한 옛날 기록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모아왔다.

'선비의 악기'로도 불리던 거문고는 옛날부터 선비들이 마음 수양의 반려로 삼아온 악기다. 그런 만큼 거문고는 수많은 사연과 이야기를 담고 있다. 거문고와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가 보고자 한다.

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bg429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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